2013년 9월 22일 일요일

구유고 음악 9: 세브다흐의 젊은 얼굴

젊은 층들이 보기에는 더 없이 '구릴 수 있는' 장르인 세브다흐가 환골탈퇴하는 데는 1990년대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한 구유고 내전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때를 기점으로 젊은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세브다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주방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모험적인 길을 택한 신진 세브다흐 장인으로는 아미라 메두냐닌Amira Medunjanin이 가장 대표적이다.

아미라 메두냐닌. 보스니아의 빌리 홀리데이 또는 보스니아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라고도 칭송된다. 두 가수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정조를 극대화하는 노래실력 때문이다. 

아미라 메두냐닌은 사라예보 출신 여성 세브다흐 가수다. 90년대 유고 내전에 사라예보가 근대사상 최장기간 포위를 당하면서 바로 그곳에서 우울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생존이 급한 시대에 음악 교육을 따로 받을 여유가 없었지만, 그 어려운 때에도 지하에서 열리는 게릴라성 콘서트는 꾸준히 찾아갔다고 한다. 가수가 된 것은 좀 뜬금없는데, 전시 사라예보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조직하던 오늘날 남편을 만나서, 우연찮게 노래를 따라부르던 것이 가수가 되는 길이 됐다. 그녀의 테이프를 들은 모스타르 세브다흐 레우니온Mostar Sevdah Reunion(MSR)이 객원 가수로 초빙해서, 2003년 Secret Gate 제작에 참여한 것이 직업가수로서의 첫걸음이다. 

아미라가 부르는 세브다흐는 슬픔의 정조에 더욱 특화되어 있다. 그래서 이름하여 카라 세브다흐Kara Sevdah (Black Sevdah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콘서트에서는 항상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나온다. 극도의 슬픔을 다한 후에 느끼는 카타르시스. 그것이 그녀 음악의 지향점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세브다흐가 전달되는 방식이다. 어쩔 때는 서양재즈에 어쩔 때는 바로크 류트와 같은 고악기를 반주로 나오는 그녀의 세브다흐는 기존의 음악을 상당부분 해체/재구성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이것이 모던 세브다흐인가? 아티스틱한 면모가 더 분명해 지는 것은 분명하고, 또 이 같은 시도로 인해서 그 지평이 넓어지는 것 역시 분명한 듯 하다. 더 나아가 아미라의 시도를 두고 세브다흐의 본질을 훼손했느니 지적하는 사람도 없다. 가까운 역사에서 쓴 맛을 봐서 그런지 그녀가 우울한 노래들에 대한 이 지역 대중들의 반응도 좋다.

류트 연주자 에딘 카라마조프Edin Karamazov와 같이 한 2010년 이스탄불 공연모습. 서구 바로크 시대의 악기와 오리엔트의 노래가 예상외로 잘 맞는다. 부르는 노래는 '아 사랑을 숨겨야 하다니'Ah što ćemo ljubav kriti. 에딘 카라마조프는 스팅과 더불어 존 다울랜드의 노래를 앨범으로 낸 사람이다. 아미라 메두냐닌과 마찬가지로 보스니아 출신. 

지금까지 네장의 독집 앨범을 냈는데, 앨범 마다 새로운 컨셉트를 채용했다. 세브다흐 장르의 혁신자로서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항상 대담한 실험을 동반하면서 MSR 등과 같은 선배 뮤지션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됐다. MSR의 최근 앨범, Tales From A Forgotten City는 전례없는 실험을 하다가 망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미라 메두냐닌 따라하다 망한게 아닌가 싶다.

아미라가 내놓은 앨범 모두 하나 같이 들을만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노래는 2009년 앨범 Zumra에 수록된 '엄마가 메흐메드를 깨웠다'Mehmeda Majka Budila다. 단순한 노래인데, 가사가 심상치 않다.

내용인 즉 엄마가 아들 메흐메드를 깨운다. 잠에서 깨어난 메흐메드가 이야기한다. 여동생이 자기의 팔을 묶고, 아버지가 눈을 가리고, 엄마가 심장을 도려내는 꿈을 꿨다고. 노래는 잠을 깨우는 노래라고 하지만, 곡조는 어째 자장가인가? 평안한 집안에 왜 메흐메드는 이런 악몽을 꿨는가? 한두가지가 수상치 않은 이 곡을 아미라가 메리마 클류초의 불협화음 아코디온 반주에 맞춰 부르는데, 듣는 사람 기분이 서늘해 진다. 노약자와 임산부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앨범에 수록된 Mehmeda Majka Budila. 자장가풍의 단순한 노래에 섬뜩한 불협화음 아코디온 반주를 태워서 가사가 가지고 있는 기묘한 전복적 성격을 극대화했다. 

아미라 메두냐닌의 가수로서의 활동은 앨범보다는 콘서트에 방점이 더 맞춰져 있다. 앞에서 소개한 에딘 카라마조프 등과의 협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앨범으로 발매되지 않았다. 유럽의 주요도시가 그녀의 콘서트 무대다. 기본적으로 깔고들어가는 기조 때문인지 무대의상은 유난히 검다. 노래는 주로 슬프지만, 공연 중간에 실없는 웃긴 소리도 많이 한다. 2013년 최근에는 같은 보스니아 출신의 클래식 기타 연주자 보쉬코 요비치Boško Jović와 같이 순회하고 있다. 이 역시 앨범으로 발매되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지만, 콘서트를 참여할 수 있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되겠다. 콘서트를 참여할 수 만 있다면...




2013년 9월 15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11 : 1914년 운명의 날

1878년 합스부르크 황가의 보스니아 통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가운데, 둘 사이에 놓인 무슬림들. 무슬림들도 스스로를 누구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는 상황이다.

사뭇 팽팽하게 돌아가던 팽이에 다른 각도에서 스핀이 들어왔다. 1908년 터키 본토에서 '청년 터키' Young Turk 쿠데타가 일어났다. 젊은 군인들이 술탄을 압박해서 근대적 의회주의에 근거한 입헌군주국을 도모한 것이다. 오스트리아로서는 난제였다. 입헌군주, 의회, 다 좋은 데, 오토만 터키 정부가 법적 주권을 지닌 보스니아에서도 지역대표를 소집한다 치면 어쩔건가? 오스트리아 통치 지역의 대표들이 터키의 국회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지금까지 맘속으로만 간직하던 '합병'을 선포한다. 보스니아는 실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땅이 된 것이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 발표는 지역에서 일련의 정치적 소요와 위기를 야기했다. 흔히들 말하는 합병 위기annexation crisis가 바로 이것이다. 가장 흥분한 것은 세르비아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들이었다. 흉중의 대세르비아로 가는 길이 더욱 멀어졌기 때문이다.

각종 비밀결사와 혁명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스니아에서는 '청년 보스니아'Mlada Bosna 라는 이름의 복잡하고도 광범위한 배경의 학생운동 흐름이 형성됐다. 이들 학생들 중 일부가 세르비아 본토의 민족주의 단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사보타지, 폭탄제조 및 무기 사용법 등을 배웠다. 그 중의 하나가 가브릴로 프린찝이었다.

민족주의 청년의 초상. 가브릴로 프린찝Gavrilo Princip. 1912-13 발칸전쟁 때 세르비아 군에 자원했으나 '너무 병약하고 왜소해서' 복무를 거부당했다. 하지만, 제대로 큰 사고를 치는 데는 큰 체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암살 당시 미성년(20세 이하)이었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징역 도중 병몰.

이렇게 벌집 쑤셔놓은 듯한 보스니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드가 뜬금없이 방문한다. 당연히 열혈청년들이 암살계획을 세운다. 이들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날짜는 1914년 6월 28일, 성 비투스의 날Vidovdan.

암살범들의 아마추어리즘은 너무 명확했다. 황태자를 기다리던 암살자들은 모두 여섯명. 밀랴츠카 강변에 새로 조성된 길을 따라 시청으로 향하던 황태자 부부. 환영인파들에 대한 황실 서비스의 일환으로 무개차를 탔다. 기다리던 암살자1. 너무 떨려서 차를 그냥 보낸다. 조금 뒤의 암살자2는 좀더 대범했다. 수류탄을 던졌는데, 황태자는 무사하고 그 뒤를 따라오던 수행차량으로 떨어져 사상자가 나왔다. 암살자는 망명도생코자 그 자리에서 밀랴츠카 강으로 뛰어내리다가 발목이 접질렸다.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가족사진. 황태자는 나름 로맨티스트였던지 황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비깜이 아니었던 색씨과 결혼했다. 총을 맞고 부인을 부르면서, '애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살아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사는 것은 황가라고 다르지 않았던 듯.

소란 속에 얼마 안떨어진 시청까지는 도착했으나 황태자는 환영사고 축사고 공식일정을 소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수행원이 다쳤다니 문병이나 갈까? 그 자리에 있던 보스니아 총독이 말린다. 일단 숙소에 짱박히는 게 상책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최종 행선지가 1호차 운전수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다시 밀랴츠카 강변길을 내려가다 운전사는 황태자를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우회전을 튼다. 뒤에서 호통이 터졌다. '이봐 어디가. 거기가 아니지!' '어렵쇼. 여기가 아녀?' 차를 멈췄다. 바로 그 자리에 프린찝이 있었다. 무개차, 코 앞에 황태자 부부, 내 손에 총. 나머지는 역사가 됐다.

암살 직후 혼란통에 포착된 체포 장면. 쥐어터지는 프린찝. 시아나이드 독약을 깨물었으나, 불량품이었는지 그대로 토하고 잡혔다. '황태자 부부가 죽었다는 것' 빼 놓고는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암살 기도였다. 

황태자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나섰다. 그 책임을 놓고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통보했다. 이렇게까지 사태가 진전될 줄 몰랐던 세르비아로서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근 몇 년간 발칸 전쟁 등을 통해 영토를 넓혀가면서 한참 기세를 올렸지만, 국력으로나 어느 면으로나 자신의 몇 배나 되는 대제국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자.. 잠깐만.. 손들어 말리고 싶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민족의 화약고, 발칸이라는 악명은 이 사건으로 더 공고해졌다. 하지만 이들을 멸시하던 고아한 서유럽은 더 큰 야만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2013년 9월 9일 월요일

보스니아 유사 10 : 합스부르크의 하늘 아래 1878 이후

1878년 베를린 협약의 결과.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경영하기로 한 결정은 보스니아의 기득권 무슬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당장에 반항이 일어났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군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사라예보 등 주요 거점 마다 무슬림(+일부 세르비아계)들의 봉기가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군이 이들 주요 도시를 접수하는 데는 이틀 이상이 걸리지 않았다.

1878년 이후 한창 때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판도. 2중 제국의 예법에 따라, 헝가리와 제국의 영역을 반으로 나눴다. 수도는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보스니아와 달마시아가 오스트리아의 땅으로 지명되고 헝가리가 오늘날 슬라보니아와 크로아티아 본토를 관리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기는 했지만, 보스니아를 통치하기로 결정한 것도 오스트리아로서도 숙고를 거듭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역사를 통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욕은 다양한 경로로 노출된 바는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의 장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말은 '살로니카로..'Nach Salonika였다고 한다. 오늘 날의 그리스 영토인 테살로니키까지 쭈욱 밀고 나가자는 말이다.

말은 호기있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이쪽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이 여러가지 면에서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제국영토 안에 슬라브 민족이 더 많아진다는 것. 인구 비중의 균형추가 슬라브 쪽으로 더 기울어졌을 때 늘어나는 부담과 리스크가 분명했다. 헝가리가 관리하는 크로아티아에서도 이미 민족주의가 들썩이고 있지 않던가. 그래서 그랬는지 보스니아는 헝가리 쪽에 넘기지 않고 황유지Crown Land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공동관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손을 대기로 한 이상, 어중간한 스탠스는 있을 수 없었다. 오토만 터키의 국권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이 땅을 제대로 경영해서 다시 오토만에게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이미 독일, 러시아 등과는 적당한 때 '합병'한다는 합의가 이뤄진 마당이다.

이러한 오스트리아를 환영한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보스니아의 카톨릭 크로아티아계였다. 이제 카톨릭이 어깨좀 펴고 살수 있으려나 기대를 했을 법도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점진주의를 표방했다. 특별하게 문제가 있지 않는한 오토만의 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러면서 점진적으로 사라예보를 비롯한 근대화의 물결을 끌고 들어왔다. 사라예보가 허다한 모스크와 바자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근대도시로 본격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다.

오스트리아의 영향으로 무슬림 도시 사라예보에 맥주집도 생겼다. 사진은 사라예보에서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맥주홀인 Pivnica HS의 모습이다. 바쉬차르쉬야에서 봤을 때 밀랴츠카Miljačka 강 건너편에 있다. 물이 있다보니 90년대 사라예보 포위 당시에 중요한 식수공급원이었다고 한다.

군사적, 경제적 목적에서 철도와 도로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광산이 개발되는 한편 방직 등 공장들이 들어오면서 농업을 중심으로 이뤄진 보스니아의 면모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역시 뭔가 좀 보여주려 했던지 보스니아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화 물결과 더불어 근대 민족주의의 바람도 더 거세졌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것 만은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맘 대로 되나. 민족 별로 단체가 생기고 회합과 결사가 일어났다.

19세기 말, 사라예보에 들어선 근대식 숙박업소 에우로파 호텔 Hotel Europa 앞의 정경. 페즈를 눌러쓴 이슬람 신사와 더불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 농민들이 주거니 받거니 거래 중이다. 보스니아는 민족갈등으로 유명해 졌지만, 실질적으로 갈등이 있었던 때는 많지 않다.  다수의 방문자들이 이들 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목도했다.

어떻게 하나 뻘쭘한 것은 무슬림들이었다. 같은 남슬라브 민족인 것은 맞지만, 자신을 과연 크로아티아계로 봐야할지 아니면 세르비아계로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지사들은 무슬림들이 실제로는 크로아티아 민족이라고 말하고, 세르비아 계는 기실 세르비아 민족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거기다 크로아티아-세르비아 너나 없는 남슬라브 민족주의까지 가세하니, 무슬림들은 더 헷갈리게 됐다.





2013년 9월 8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9 : 19세기 중후반 요람을 흔드는 손

오토만의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전반에는 보스니아로서도 외부의 입김이 강해져 갔다. 현저하게 도드라진 새로운 현상은 역시 세르비아 자치령의 탄생이다. 400년 동안의 질곡에서 해방된 어린 민족의 자기주장이 보스니아에서도 투영되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의 정교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기독교인'hrišćani이 아니라 '세르비아인'srbi으로 칭할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새롭게 서구열강의 인정을 획득해나가던 몬테네그로 역시 헤르체고비나를 끊임없이 도모하기 시작했다. 대세르비아의 주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쪽의 크로아티아에서도 마찬가지 민족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슬라브주의와 평행선을 이루면서 순혈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이 1860년대 보스니아 내에서 혁명조직을 구축하려 했지만, 이들의 움직임을 발각하고 탄압한 것은 오토만과 마찬가지로 슬라브 민족주의를 경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19세기 중반은 오토만 터키에서 종교/민족 간의 차별을 철폐하는 술탄의 칙령이 발표되는 등 탄지마트Tanzimat 개혁운동이 일어났던 때이다. 이 같은 소식은 보스니아에서는 아직 딴 나라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 여러가지 기독교도에 대한 처우가 향상되기 시작하는 등 개혁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 트라브닉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카톨릭과 정교 교회당 신축이 허가되는 한편 초중등학교들이 건설됐다.

하지만 취약한 행정체계나 문화가 쉽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새롭게 도입된 징세 시스템은 기존에 크게 악화된 지주/소작농 간의 관계와 더불어 보스니아의 정치적 안정성을 크게 저해했다. 여기에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가 겹쳐지면서 19세기 보스니아는 지속적으로 흔들거렸다. 거기에 더해서 무슬림들의 기독교 세력에 대한 경계, 이를 넘어선 혐오 현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에 새롭게 건립되는 교회당 종탑의 높이 등은 안그래도 위협감을 느끼는 무슬림들에게는 중요한 이슈였다.

사라예보 중심부의 세르비아 정교 교회Саборна Црква Рођења Пресвете Богородице. 성모에게 봉헌된 이 교회는 1863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완공 즈음해서 기득권 무슬림들이 종탑의 높이를 두고 딴지를 거는 바람에 하나의 정치적 이슈로까지 비화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보스니아의 건곤을 일척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Herzegovina Uprising다. 1874년 대흉년으로 헤르체고비나의 작황이 엉망이었지만, 징세관들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이에 소작농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에 보스니아 총독과 지주들이 가혹하게 대처했다. 서구 국제사회에서 야만적 오토만에 대한 지탄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산속에 매복한 헤르체고비나 반군. 디나릭 알프스 산악지대가 이들의 앞마당이다. 어려운 지형, 어려운 생활환경 등이 이들을 터프한 전사들로 만들었고, 이 같은 문화는 후대에까지 전승된다. 

슬라브(세르비아) 동포들의 고난을 눈뜨고 볼 수 없다는 명목으로 187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똑같이 오토만 터키에 전쟁을 선포했다. 두 신생국가 사이에는 보스니아 본토는 세르비아가, 헤르체고비나는 몬테네그로가 접수하기로 밀약이 있었다고 한다. 국지적 봉기가 국제적 분쟁으로 흘러가는 순간이다.

몬테네그로는 잘 싸웠지만, 세르비아는 덤벙대다 오히려 곤경에 빠졌다. 좀 진전이 더디다 싶자, 1877년 큰 형님 러시아가 불가리아 문제까지 패키지로 들고나와, 곧장 이스탄불 코앞까지 군대를 끌고 들어갔다. 숙적 러시아까지 발칸의 올망졸망한 민족과 더불어 떼로 덤비자, 오토만 터키가 결국 백기를 드는 수 밖에 없었다. 이래서 맺어진 것이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San Stefano Treaty. 이 때 그려진 지도는 러시아의 요구가 대폭 반영된 것이다. 가만 나뒀다간 러시아가 지중해로 삐져 나오겠다 싶었던 오스트리아와 서구열강들이 협상 테이블을 다시 꾸몄다. 이래서 나온 것이 1878년 베를린 조약Treaty of Berlin.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좌)과 베를린 조약(우)에 의해 달라진 유럽 지도.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대불가리아가 만들어졌다가,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 등 서구열강의 요구로 인해 국경이 다시 조정됐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이 참에 땅도 넓히고 독립을 쟁취했다.

이 조약에 의해서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가 점령하는 것으로 결정이 됐다. 왜 보스니아가? 발칸에서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앞세워 세력을 넓혔으니, 오스트리아도 여기에 균형을 맞추자는 뜻이다. 정확하게는 오스트리아와 오토만 터키의 콘도미니엄Condominium의 형태다. 내용인 즉 보스니아의 국권은 오토만이 지속 보유하되, 경영만 오스트리아가 하자는 소리다. 그러나 세력의 균형추가 무너진 상황에서 보스니아의 실소유주는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지방의 봉기가 지정학적 화학반응을 일으켜 희한한 결말을 만들어 냈다. 봉기를 주도했던 지도자들이나, 이를 탄압하던 보스니아 정부군 누구도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다. 한 순간에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세르비아계들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는 더 멀어지게 됐다.





2013년 9월 7일 토요일

보스니아 유사 8 : 급박해진 19세기 전반

비엔나나 이스탄불의 입장에서는 어디서나 궁벽한 촌동네일 수 밖에 없었던 보스니아에도 변화의 바람이 본격화된 것은 19세기다. 서구세계와 오토만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다양한 물결을 일으키며 보스니아에 전달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서구세계를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오토만 조정에서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제의 개혁이었다. 구식군제가 아닌 서구 근대적 군제의 도입이 그 핵심이었다. 그러나 구식 군제를 대표하던 예니체리가 문제였다.

예니체리 혁파를 통해 오토만 터키를 개혁코자 했던 마흐무드 2세. 18세기 이후 술탄들은 서구의 영향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개혁을 추진했지만, 여러가지로 여의치 않았다. 근대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국가가 속출하는 시기에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으로 이뤄진 제국을 꾸려나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수도....

한 때는 오토만 터키의 정예병 예니체리는 역사를 거치면서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 18세기 오토만 술탄의 개혁노력을 번번히 좌절시켰다. 1826년 술탄이 새로운 군제에 의한 근대군 창설을 지시하자, 예니체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쿠데타를 기도했다. 그러나 이 때의 술탄 마흐무드 2세Mahmud II는 전대의 술탄과 달리, 나름의 준비가 있었다. 이스탄불에 모인 예니 체리들을 기다린 것은 프랑스 포병교육을 받은 근대식 포병대. 이들을 쥐구멍에 몰아넣고 포도탄grape shot으로 전멸시켜 버렸다. 술탄은 이 참에 눈엣 가시 같던 예니체리도 해체한다.

예니체리 복장을 한 근대 터키의 국부, 케말 파샤Kemal Paša. 터키 과거의 영화를 상징하기도 하는 예니체리는 18-19세기초 기간 중 번번히 오토만 개혁을 방해한 수구정치집단이었다. 이들 때문에 술탄도 여럿 쫓겨났다. 능력주의에 입각했던 초기와 달리, 세습화된 것이 예니체리가 변질된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들 지적한다. 

술탄은 보스니아에도 징집에 근거한 근대식 군제 개편안을 추진할 새 총독을 선임해 보냈다. 하지만,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반항도 만만치 않았다.그러자 오토만 군대가 나섰다. 1827년 술탄의 군대가 사라예보에 입성, 로컬 예니체리 리더들을 처형하는 등 초강수를 써서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지방 곳곳에서 소요가 지속됐다.

1831년에는 보스니아 북부 그라다차츠Gradačac의 카페탄 후세인Husejn이 봉기를 일으켜, 총독이 주재하는 트라브닉까지 짓쳐와서 총독을 생포했다. 앞 편에서 간단히 그림으로 소개한 바, '보스니아의 용'zmaj od bosne으로 칭송되는 사람이다. 같은 시기 알바니아에서도 봉기가 일어나자, 후세인은 오토만군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2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코소보까지 내려간다. 도와준다는 명목이었지만, 이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다름 아닌 보스니아 자치였다. 일단 발등의 불이 급했던 오토만 조정은 이들의 요구를 승낙(하는 척) 한다.

카페탄 후세인. 수염때문에 나이가 들어보이지만, 이 사람이 죽은 때가 30대 초반이다. 카페탄으로 있으면서 카톨릭, 세르비아 정교인들에게도 선정을 베풀었다. 이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도 보스니아에서는 한동안 그 이름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시절 내내 묻혀있다가, 유고 내전 이후 보스니아의 영웅으로 '재발굴'됐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도 다른 보스니아 만의 정체성의 상징으로..

그러나, 오토만 조정은 실제로 이들의 요구를 들어 줄 의도가 없었다. 기만 및 내부분열 전술로, 반란군을 반으로 쪼갠 오토만 터키는 1832년 잔당 세력을 사라예보 근처에서 격퇴한다. 후세인 카페탄은 일차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가, 술탄의 용서를 받아 트레비존드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933년에 죽었다. 반란세력의 기가 꺾이면서, 보스니아에서도 다양한 개혁조치가 진행됐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누구도 만족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무슬림들은 무슬림대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대로 불만이 누적되기 시작한다.

이러던 상황에서 드디어 보스니아에서도 또 다른 용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민족주의라는 이름의 용이었다.





2013년 9월 5일 목요일

구유고의 음악 8 : 모스타르에서의 재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음악으로 이야기하자면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한 세브다흐처럼 극적인 변화를 거듭한 장르가 없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신파조의 멜랑콜리 추구'라는 세브다흐의 기본적인 덕목이 1990년대 유고 내전을 거치면서 새로운 설득력을 얻으면서 새로운 음악적 변화를 거듭해 가고 있다.

당금 보스니아에서 세브다흐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음악인(집단)은 모스타르 세브다흐 레우니온Mostar Sevdah Reunion(이하 MSR). 프로듀서 드라기 셰스티치Dragi Šestić가 고향 모스타르Mostar 출신 음악인들과 투합하여 만든 프로젝트 밴드다.

2002년 경의 MSR. 앞에서 담배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밴드의 보컬 일리야 델리치Ilija Delić옹. 약간의 주책기가 있지만, 담배에 찌든 텁텁한 목소리가 매력포인트다.

모스타르는 보스니아 남부 헤르체고비나의 중심도시다. 이 동네가 재미있는 것은 시내 중심을 흐르는 네레트바 강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주로 무슬림들이 서쪽에는 주로 기독교인들이 살면서 다문화 다종교 사회를 표방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500년 넘게 형성된 이러한 문화적 전통이 1990년대 유고내전으로 산산히 박살나면서, 모스타르는 졸지에 비극의 도시가 된다.

레베카 웨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찬탄해 마지 않던 오래된 다리가 1993년 내전 한가운데 무너지는 영상이다. 술레이만대제 때 만들어진 이 다리는 모스타르의 자랑이자 상징이었다.  이 다리 폭파 지시를 내렸던 사람들은 2013년 현재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고 있고, 그 폭파 사실이 공소이유의 하나가 됐다.

MSR은 이러한 비극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셰스티치가 유고 내전이 한창이던 때, 모스타르 어느 골방에서 친구들과 더불어 작은 콘서트를 열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전쟁이 끝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세브다흐를 알게 될꺼야'. 밴드 멤버 중의 누군가가 그 와중에 했던 말이라고 한다. 그 말은 실현됐다.

1999년 앨범에 수록된 노래 '당신에게 숨어든다'Kradem ti se. 사랑하는 연인의 집에 월장해 들어간 화자의 절절한 심정이 들어있다. 세브다흐의 본래적 의미에 가장 부합한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델리치 옹의 목소리다. 이 때 벌써 60대 중반의 노장이었다.

내전이 끝나고 옛날 친구들을 찾아서 무슬림계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 멤버들의 재회Reunion를 이뤄낸 리더 셰스티치는 1999년 들어 첫앨범을 내고 세브다흐 장르의 대표주자로 우뚝 선다. 이들 음악의 특징은 세브다흐 고유의 본래적 전통에 서구음악의 영향을 결합시켜 구유고지역 젊은 세대는 물론 세계인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멤버들이 모두 고향을 등지거나 뿔뿔이 헤어지는 비극을 거쳤지만, 이들의 음악에는 세브다흐 고유의 슬픔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의외로 흥겹게 즐길 수 있는 노래들이 많다. 마치 흥을 통해서 슬픔을 극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2003년 Secret Gate에 수록된 '모스타르의 희한한 슬픔'Čudna jada od Mostara grada. 연인이 마음이 변할까 안절부절하는 여성의 심정을 희극적으로 풀어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이 MSR 최대명곡이 아닌가 싶다. MSR은 이 노래를 보다 '훵키'하게 풀어내기 위해 비트를 2/4에서 4/4박자로 바꿨다고 한다.  이 노래를 듣는 모스타르 청중들의 반응이 물만난 고기같다. 

그러나 2013년 현재 MSR은 Reunion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갈라선 상태이다. 보컬인 델리치 옹과 더불어 코바체비치(바이올린), 샨티치(아코디온, 클라리넷) 등이 2007년 경 밴드에서 탈퇴해서 자신들만의 MSR을 결성했다. 때문에 2013년 현재는 원 멤버들도 서로 서먹해지고 연락도 안하는 사이가 됐다. 그래서 지금은 MSR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밴드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그 소상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아무래도 드라기 셰스티치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일부 멤버들의 반란이 아닌가 싶다. 셰스티치는 MSR를 통해 세브다흐 뿐만 아니라 묻혀있던 왕년의 (집시)씽어 샤반 바이라모비치, 릴랴나 버틀러Ljiljana Buttler 등을 재발굴했다. 이들이 다시 부른 노래는 하나같이 왕년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재해석이 됐다. 허나, 이들 스타에 가려진 보컬 델리치 옹이 섭섭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똑같은 이름의 두 밴드는 각자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다만 델리치 옹의 노쇠현상이 심해지고, 드라기 셰스티치의 프로듀싱이 과도하게 실험적으로 흐르는 듯하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2000년대 초 당시의 밴드가 최전성기였다고 본다. 헤어진 것은 안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민족감정 때문에 헤어진 것은 아니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셰스티치 솔하의 MSR은 2013년 신작 앨범 'Tales from the Forgotten City'를 냈다. 밴드는 더 젊어지고 노래는 더 모던해졌다. 이 최신작에 수록된 '왜 당신은 여기 없는가'Što Te Nema는 그리운 이의 부재를 그리는 걸작이다.

모스타르에서 촬영된 Što Te Nema 뮤직 비디오. 모스타르 출신 세르비아계 민족시인 알렉사 샨티치Aleksa Šantić의 시에 노래를 붙인 장르 최대인기곡이다. 조국, 연인 또는 한용운식 님의 부재와 결핍을 노래한 이 노래는 크게는 오늘날의 보스니아, 작게는 MSR을 너무 절실하게 그려내는 듯 하다.





2013년 9월 2일 월요일

보스니아 유사 7 : 18세기 보스니아의 속사정

사라예보를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다. 이 곳은 방어가 안된다는 것을...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지만, 오토만 터키는 산으로 둘러쌓인 이곳을 보스니아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1697년 사보이공 오이겐Eugen이 이끄는 합스부르크군 6,000명이 사라예보를 감싸고 있는 어느 고지에 나타났을 때도 이들을 막을 어떤 대책도 없었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오토만 터키는 보스니아 총독Vizier의 주재지를 사라예보에서 트라브닉으로 옮겼다.

산으로 둘러쌓인 사라예보의 옛모습. 오토만 터키의 정복자들은 대체적으로 고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의 도시들과 달리 주변 어디에서도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역에 타운을 조성했다. 1990년대 스릅스카 공화국군도 주변 고지를 둘러싸고 3년 넘게 이 도시를 포위했다. 

오토만이 쇠하면서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은 각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현저하게 약해졌다는 것이다. 어느때부턴가 북아프리카에서 중동, 유럽 3대륙에 걸친 방대한 제국의 손발이 맞지 않기 시작했다. 전제군주의 의사결정이 지방으로 하달이 되지 않았고, 지방의 사정이 전제군주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방마다 유력 군벌들의 단독 행동이 많아졌다.

이 같은 사정은 보스니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스니아는 오토만 터키의 일개 지방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방 제국 세력에 대해서건 오토만에 대해서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이 같은 사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 이보 안드리치의 트라브닉 연대기Travnička Hronika다. 나폴레옹 시대, 보스니아 행정수도 트라브닉Travnik에 파견된 외교관들의 관점에서 전개된 이 소설에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물론 오토만 술탄의 대리인인 총독에게 조차 마음을 열지 않는 보스니아인들의 완고함이 잘 드러나 있다. 법률적으로 보스니아는 오토만 황제의 대리인, 즉 총독이 다스리도록 되어있지만, 이들의 실질적 지배범위는 그리 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트라브닉에 남아있는 성채. 일단 뒷산이 높고, 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어서 트라브닉은 사라예보보다는 방어상의 이점이 있다.  17세기 말부터 150년간 오토만의 총독이 주재하는 보스니아 행정수도 역할을 했다. 유고슬라비아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보 안드리치도 트라브닉 출신이다.

무엇보다 지방토호들이 만만치 않았다. 보스니아는 특히 변경이기 때문에, 현장 군지휘자인 카페탄들의 정치적 권력이 강했다. 토호들도 만만치 않아 전쟁 때문에 세금이라도 올리려 치면 여기에 민란 등을 통해 극렬저항했고, 이들에게 쫓겨난 총독들도 적지 않다.

특히 사라예보는 과거에 오토만의 보스니아 점령 당시의 공적으로 인해 각종 면세혜택 등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외지에서 파견되어 오는 총독들 역시 이들을 업신여길 수 없었다. 사라예보에 비하면 훨씬 옹색한 트라브닉이 18세기는 물론 19세기까지 계속 총독주재지가 된 것 역시 트라브닉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사라예보인들의 텃세 때문이었다. 사라예보인들은 기본적으로 상전(총독)을 다시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보스니아에서 사라예보의 태도는 특히 중요했는데, 모스타르 등 다른 도시들이 사라예보를 벤치마크로 삼은 탓이 크다.

그렇다고 보스니아의 기득권 세력들이 오토만의 정책에 대한 대안으로써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보스니아 토호들의 일관된 목소리는 언제나 수구/복고/반동 취향이었다. 현상유지가 이들의 목표였던 셈이다. 그러니, 서구 제국을 따라잡고자 술탄이 어떻게든 개혁을 추진코자 해도, 지방에서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때로는 군대를 동원해서 이들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완고한 보스니아에도 변화의 물결이 몰려들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유럽의 정세가 또 한번 요동을 쳤다. 그나마 나폴레옹에 눌려있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1820년대부터 다시금 오토만의 땅을 야금야금 먹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와 경계를 두고 있던 보스니아에서도 이 같은 영향이 슬슬 느껴지게 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