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7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5 : 나머지의 나머지

오토만 제국이 16세기 초에 들어 모하치 전투 등을 통해 헝가리를 발라버리면서  중부유럽-발칸의 정세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는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이 공고화되는 결과가 나왔고 크로아티아는 바로 문명권의 경계선이자 최전방이 됐다.

기독교 문명의 보루 Antemurale Christianitatis. 1519년에 카톨릭 교황 레오10세가 크로아티아에게 내린 이름이다. 영광스런 이름이지만, 헝가리가 오토만의 매타작으로 지리소멸하고, 국권이 오스트리아 왕가로 넘어가면서 크로아티아에 남은 것이라고는 이 영광스런 이름 빼고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남아 있는 크로아티아 땅의 1/3가량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직할지인 군사특별구.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 어울리는 말은 나머지의 나머지Reliquiae Reliquiarum라는 말이다. 오토만과의 알력, 쉽지만은 않은 베니스와의 교류 등으로 남은 것은 과거의 크로아티아 왕국의 극히 일부 만 남았다는 뜻이다. 또 다른 교황이 했다는 이 말은 자기 땅을 오토만에게 잃어버린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한탄으로 남아 계속 구전됐다.

1600년대 유럽 지도 : 16세기초까지 잘나가던 헝가리가 없어졌다. 헝가리 영토의 반의 반도 안되던 산골짜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흡수한 모습이다

더 나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은 고토회복이라는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열망보다는 오토만과의 협상을 통한 지역안정을 택했다. 걸핏하면 전쟁이 터지는 이웃나라들과의 알력 속에서 가문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인 합스부르크 왕가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크로아티아의 귀족들로서는 서운하기 이를 데 없었다.

1664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드 1세 Leopold I가 오토만과 평화협정Peace of Vasvar을 체결하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합스부르크와의 결별을 꿈꾸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크로아티아에서 그나마 영지를 보존한 즈린스키Zrinski가문과 프랑코판Frankopan가문. 크로아티아에서 반Ban*을 역임하던 니콜라Nikola Zrinski가 이 아이디어를 만지작거리다 사고로 죽자, 그 동생인 페타르Petar가 그 유지를 이어받았다. 사돈인 프랑코판Frankopan 등과 더불어 프랑스, 베니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밀담을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아예 오토만과도 내통할 생각도 했다. 사단이 된게 바로 이 오토만과의 불장난이었으니...세력 확장보다는 만사 귀차니즘에 물들기 시작하던 오토만의 술탄 메흐메드 4세Mehmed IV가 이 계획을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에게 일러바친다.

안그래도 이들의 거동들이 의심스러웠던 레오폴드 황제는 유럽 최장수 왕가의 일원답게 시간을 놓고 지켜보다가, 1670년부터 헝가리에서 관련자 대량 색출/체포/구금 등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황한 두 가문은 전국적 봉기를 선언했지만, 아무도 이들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읍소 작전. 안그래도 비엔나의 궁정에서도 모든 것을 불고 참회하면 용서해주겠다는 시그널이 왔다. 1671년 페타르Petar Zrinski와 프란Fran Frankopan이 사태를 수습해보려 비엔나를 들어갔지만 상대는 범유럽 인증 정치9단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변방 촌티나는 귀족들의 말빨이 설리가 없었다. 그 날로 체포되고, 신속한 재판 끝에 참수당했다.

이 두 잘나가던 가문이 멸망은 여러가지 면에서 크로아티아 사회에 반향을 남겼다. 크로아티아 출신 귀족들이 망하고, 몰수된 영지는 대부분 독일-오스트리아계에게 돌아갔다.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모하치 전투가 끝난 후(1527년) 부터 이 음모가 발각된 때(1670년)까지 크로아티아에는 13명의 반Ban*이 모두 크로아티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음모가 발각되고 난 직후 부터 60년 간 이 직위를 역임한 크로아티아 출신은 아무도 없었다. 더 길게 잡아 1848년까지 크로아티아 출신의 반은 단 두 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크로아티아는 이 때를 기해 정치적 암흑기에 들어서게 된다.

어차피 공화정, 입헌군주정이 도입되면서 없어질 귀족계급이긴 하지만, 크로아티아 중심 귀족들의 내파와 붕괴는 향후 크로아티아가 역사에서 방향을 잡고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상치 않은 결핍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다. 특히 즈린스키 가문은 16세기 초 오토만과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니콜라 슈비치 즈린스키Nikola Šubić Zrinski와 같은 영웅을 다수 배출한 집안이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대표집안 3인 Nikola Šubić, Nikola, Petar에게 자그레브 시내에 명당자리에 즈리녜바츠 공원 Zrinjevac을 헌정하여 이들을 기념하고 있다.

한겨울 크리스마스 때를 맞춰 한껏 전등으로 치장한 즈리녜바츠 공원, 주말마다 밴드 공연, 점잖게 춤추는 자그레브 시민들을 볼 수 있다.

2013년 2월 23일 토요일

구유고의 음악 1 : Laibach - Tanz Mit Laibach

다른 나라의 도시들을 부를 때는 늘 등장하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영국이 잉글랜드나 그레이트 브리튼이 아니라 영국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 민족과의 접촉이 잦았던 슬로베니아 이하 발칸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라이바흐Laibach는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Ljubljana를 독일 사람들이 지칭하는 말이다. (또 다른 예로 자그레브를 독일 사람들은 아그람Agram이라고 불렀다.)

유고슬라비아는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는 다르게 잘 발달된 록씬이 있었다. 록이 기본적으로 반항적인 메시지와 청년들의 반문화에 편승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보다 극단까지 밀고들어간 밴드가 있다. 80년 티토가 죽고 난 뒤 얼마 안되 슬로베니아에서 결성된 밴드 라이바흐Laibach다. 일부러 독일어로 밴드 이름을 짓고 독일어로도 노래를 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2차 대전 등의 이유로 독일을 싫어하는 공산당 정권을 엿먹이기 위한 것이라는 속설이있다.

나찌 군장의 라이바흐. 다 이해가 가는데, 보컬 밀란 프라스Milan Fras가 쓰고 나오는 두건은 좀.... 

밴드 이름이야 어찌됐건 이 밴드가 들고 나온 음악 자체도 논란과 오해의 소지가 많았다. 나찌 이미지를 차용하고 나찌풍 제복에 군가풍의 노래를 부르는 이 밴드를 두고 네오 나찌의 등장이네, 민족주의네 전체주의네, 극우네 극좌네 해석이 분분했던 것이다.

이들의 존재를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기성정치권은 심각하게 불편해 했다. 왜 하필 독일어 이름? 왜 하필 전체주의? 왜 하필 지금? 이러한 문제로 인해 이들은 한동안 밴드 이름을 제대로 표기하지 못하거나, 공연이 금지되는 일을 겪었다. 초기작들은 독립 레이블이나 해외 레이블을 통해 발매됐다. 첫 앨범도 결성 5년 만인 1985년에 나왔다.

라이바흐의 데뷰앨범 Laibach에 나오는 첫곡 Sila (Force라는 뜻). 화면에 십자가가 등장하는 데, 이들은 종종 십자가 완장을 차고 나오기도 한다. 종교적 반동주의로의 회귀? 이들은 한 인터뷰에서 '신의 존재를 믿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Yes, we believe in God but, unlike Americans, we don’t trust him.)라고 밝혔다. 카톨릭들도 이들을 싫어한다.

이것이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체제 때문이었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도 이들을 불편하게 보는 시각이 많았다. 나찌의 재림? 아니면 공산주의 선전선동? 이 때문에 80년대 이들이 미국에서 공연을 추진했을 때, 미국은 이들을 공산주의 프로파갠다 밴드로 보고 입국을 불허하기도 했다.

여기에 밴드 그 자체가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해명한 적이 없으니, 그게 더 감질나는 부분이다. 밴드의 리더가 인터뷰에 대해서 '우리는 히틀러가 화가인 만큼 파시스트다'(We are fascists as much as Hitler was a painter)라고만 말했다. 좀처럼 자신의 캐릭터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인터뷰는 차라리 정치세력의 기자회견에 가까운 적이 많다. 이와 관련해서는 Moe Bishop의 리뷰 참조.

만약 예술가들의 임무가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도발'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들의 음악적인 작업은 당시 슬로베니아 청년 예술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종합예술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것이 신슬로베니아예술Neue Slowenische Kunst이다. 때문에 이들의 작품은 단순한 밴드가 아니라 뜻을 함께하는 예술가단체 작업의 결과다.

이들의 음악은 인더스트리얼 록Industrial Rock으로 분류된다. 슬로베니아는 구유고 지역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이기도 했다. 이런 산업현장에서 나오는 소음 등이 이들의 음악에 등장한다.  다양한 오리지널 작품들도 내놨지만, 이들 작업의 상당수는 이미 발표된 음악의 리메이킹으로 채워진다. 비틀즈, 롤링스톤즈 등의 작품으로만 구성된 앨범들도 나왔다. 왜 리메이킹인가? 이들의 예술작품의 오리지널리티 자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리지널이 어찌됐건 이들의 리메이킹으로 새로운 의미부여와 해석이 가능해지는 점은 매우 놀랍다.

한 예로 이들은 퀸Queen의 'One Vision'을 국가의 탄생Geburt Einer Nation이라는 독일어 노래로 개작한 적이 있다.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One flash of light / One God, one vision / One flesh, one bone / One true religion / One voice, one hope / One real decision' 이라는 가사를 이들이 독일어로 게다가 군가풍으로 다시 부를 때 전달되는 분위기는 너무나 생경하다. 프레디 머큐리의 비전은 새로운 맥락에서 얼마든지 전혀 반대의 의미로 전달될 수도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국가의 탄생Geburt Einer Nation. 1987년 발표작이다. 국가의 탄생.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영화사의 걸작이지만 인종주의 시각을 담아 비난을 받는 Grifith의 영화(Birth of a Nation)도 같은 제목이다.  머큐리의 평화와 대동단결에 대한 호소는 국가의 의지 또는 집단의 의지로 치환된다.

예술가라면 이 정도로 섬뜩할 수도 있어야 겠지. 80년에 결성됐으니 이제 30년 넘는 역사를 지닌 밴드가 됐다. 물론 아직도 활동중이고 건재하다. 유고슬라비아 기성 정치체제에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시작한 밴드는 유고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이들의 음악이나 예술적 태도가 보여주는 날선 비판과 대치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2003년에 발표된 '라이바흐와 춤을'Tanz mit Laibach은 밴드의 오늘을 보여주는 히트작이다.

라이바흐와 춤을'Tanz mit Laibach'. 전체적으로 4박자 행진곡이지만, '댄서블'하다. 이들은 1982년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산업생산, 나찌 예술, 전체주의, 야수적 행동과 더불어' 디스코'(!)를 꼽은 바 있다.

이들의 예술적 태도가 워낙 첨예하다보니, 대중적 기반은 넓다고 보긴 어렵다. 잘 해봐야 컬트 밴드 정도? 대부분의 컬트 밴드가 그렇듯이 나름대로 후대 음악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그 영향을 받은 대표적 밴드가 람슈타인Rammstein이다. 강력한 헤비메탈 배경에 아름다운 멜로디를 넣을 줄 알았던 독일산 이 밴드가 불렀던 Du Hast는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라이바흐 골수 팬들은 람슈타인을 Laibach-Light 정도라고 깔보는 경향이 있다. 애들이나 듣는 음악이라는 뜻.

너무 팍팍한 음악만 소개한 데 대한 사과의 표시로 람슈타인의 Du Hast를.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4 : 오토만의 내습

요즘 크로아티아 텔레비전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는 다름아닌 터키산 대하 드라마 술레이만 대제Suleiman Veličanstvo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이 이야기하기를, 이 드라마를 보면서 크로아티아가 터키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수 있다고들 한다. 터키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터키말에서 간간히 나오는 간투사들 Baš, Zar, Barem 등은 크로아티아어내에도 굳건히 자리 잡은 단어들이다. 정작 크로아티아는 오토만 터키의 완전한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역설적으로 무력으로도 크로아티아를 들어올 수 없었던 터키는 21세기가 되어 드라마로 크로아티아 안방까지 들어온 것이다.

술레이만 대제의 터반 위용 : 사물을 그리는 것을 기피했던 이슬람 전통을 벗어나 베네치아의 화가가 그린 초상화다. 이 때는 서구의 제국들이 오토만에게 알랑거렸다.

헝가리의 지배를 받으면서 여러가지 다사다난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크로아티아인들의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자극을 준 것은 역시 오토만 제국의 서진이었다.

헝가리는 종교적으로 카톨릭을 신봉했으므로 일상적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살아오는 방식을 바꿀 만한 근원적인 차이점이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을 신봉한 오토만 터키는 크로아티아에는 존재론적 위협이었다. 게다가 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들 사이에는 오랜 적대의식이 쌓여있던 상황 아니었던가.

13세기 아나톨리아에서 발흥한 오토만 터키는 야금 야금 비잔틴의 영지를 침식해 가면서 세력을 확장하더니 14세기에 세르비아 왕국을 밀어버리고, 15세기에는 소리소문 없이šaptom pade bosna 보스니아를 병탄했다.

이제 갈길을 막는 것은 헝가리(크로아티아 포함)였는데, 1493년 첫번째 조우에서부터 여지없이 오토만 세력에 밀리기 시작했다. 16세기 초에는 자그레브 부근에까지 오토만 군사들이 들락거렸으며, 헝가리의 영웅 마쨔쉬왕Mathias Corvinus와 야노쉬 훈냐디Janos Hunyadi가 잠시 오토만의 서진을 성공적으로 막았지만, 그것도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의 일이었다.

1519년 로마의 교황 레오 10세는 크로아티아를 '기독교 문명의 보루'Antemurale Christianitatis라고까지 칭했다. 하지만 욱일승천의 오토만 터키를 막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으니, 1520년에 즉위한 술레이만 대제는 헝가리는 물론 서구문명 자체가 상대하기 어려운 '걸물'이었다. 1526년 술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터키군과 헝가리 군이 모하치Mahacs에서 대치했고, 그 결과로 헝가리의 왕이 전사하는 최악의 참패를 겪었다. 이로 인해 헝가리 왕국은 붕괴되고, 헝가리 민족에게는 이 때가 (안좋은 방향으로 가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모하치는 헝가리 속담에도 들어가, 최악의 상황에 비견되는 상투어가 됐다.(아무리 상태가 안좋아도 모하치 때보다는 낫다는...)

이러한 차제에 크로아티아와 헝가리가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길은 결국 옆나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1533년에는 크로아티아 의회Sabor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Ferdinand를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옹립하면서 어떻게든 오토만의 진군을 막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16세기 내내 영토를 잠식당했으며, 크로아티아인들의 집단이주가 줄을 이었다. 그 결과 슬라보니아 평야와 달마시아의 상당부분이 터키 제국의 영토가 된다.

1500년경 유럽의 판도 : 발칸이 어느덧 오토만 터키의 영토가 됐으며 이를 막아선 것이 헝가리다
* 자료원 : http://www.euratlas.net/history/europe/fr_index.html

오스트리아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도입한 것은 터키와의 접경지대에 군사특별구Vojna Krajna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의 대량 피난으로 인해 만들어진 지리적 공백에 누구나 와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주되, 관할권을 크로아티의 귀족들이 아닌 황제 직속 군사령관에게 줬다. 워낙에 언제 침략당할지 모르는 열악한 땅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는 면세혜택을 내리는 대신, 언제든지 오스트리아가 주민을 군인으로 차출할 수 있는 권리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헝가리인이던 독일인이던 크로아티아인이던 누구나 다 정착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땅에는 오토만 통치를 피해 도망나온 세르비아인들이 눌러살게 됐다. 군사특별구는 나중에 크로아티아 역사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 주민간의 사이가 나빠지게 된 단초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크로아티아인들 입장에서는 원래는 자기 땅인데 다른 민족이 와서 살면서 귀족들의 관할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또 면세혜택으로 나름대로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을 것이다. 세르비아인들 입장에서는 오토만의 서진을 막아주고 있다는 자의식에 새로운 뿌리 의식이 결합되면서 자신을 어떻게든 지배하려는 크로아티아인들의 입장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오토만은 앞으로 500년에 걸쳐 남동유럽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흔히 다뉴브 이남 남동 유럽 지역을 발칸반도Balkan Peninsula라고 부르는 데, 발칸이라는 말도 터키말로 숲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칸 하면 발칸포Vulcan 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데, 그런 무식한 이야기는 여기와서 안했음 좋겠다.) 오토만의 직접적 지배를 받지 않았던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발칸이란 말에 대해서 거부감이 강하다.

2013년 2월 4일 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3 : 베니스의 입김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가 이태리 베니스 공화국 사람으로서 동방견문록을 저술했다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마르코 폴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오늘날 크로아티아 남단의 섬 코르출라Korcula라는 것이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믿음이다. 물론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지만, 오늘날 코르출라섬에 가면 마르코 폴로가 태어났다는 집이 있다.

코르출라섬의 마르코폴로 생가라고 주장되는 곳
* 자료원 : http://www.korculainfo.com/marcopolohouse/

베니스의 시민인 마르코 폴로가 크로아티아 남단의 섬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베니스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서 얼마나 도저했나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 쿠빌라이 칸을 만나게 되는데, 어차피 서력 1242년 몽골 군단은 크로아티아 시골구석까지 말을 몰고 쳐들어왔으며,  헝가리 왕 벨라 4세는 이들을 피해서 달마시아 구석을 전전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베니스 사람들에게 몽골은 직접적 위협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익히 그 명성이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1200년경 유럽 판도 : 베니스의 영향력이 아드리아해를 중심으로 완연함을 보여준다. 나라의 국경이 항상 세력에 따라 유동적이던 시기에 베니스는 해상장악력을 바탕으로 한참 커나가기 시작한다
* 자료원 : http://www.euratlas.net/history/europe/fr_index.html

헝가리의 기세가 크로아티아를 덮던 12세기에도 베니스의 달마시아 공략이 지속됐으며 13세기초 4차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베니스 공화국이 십자군을 고용해서 자다르Zadar를 함락시키는 일도 일어났다. 이러 저러한 역사적 곡절을 거쳐 달마시아를 둘러싼 헝가리-베니스 간의 줄다리기는 15세기까지 지속됐다. 이러한 줄다리기에서 벗어나 해변지역이 베니스의 지배하에 안정적으로 복속된 것은 헝가리가 자중지란에 빠졌던 15세기 초부터의 일이다. 달마시아를 비롯한 크로아티아 해변지역은 그 이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나서기 전까지는 이태리 땅이었다.

15세기 경 베니스의 세력도 : 영토적 욕심보다 무역을 기반으로 살아나가던 나라라는 게 잘 드러난다
* 자료원: http://en.wikipedia.org/wiki/Republic_of_Ven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