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7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2 : 그래도 역사는 있었다.

보스니아의 과거가 묘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찬란한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약간 먼저 왕권국가가 성립된 크로아티아가 11세기 들어 헝가리에 복속되던 때, 보스니아를 명목상으로 지배한다고 했던 것은 비잔틴 제국이었으나, 실질적인 지배는 못하고 있었다. 크로아티아를 정복한 헝가리가 보스니아도 자기 땅이라고 우겼지만, 이것도 거의 뻥카에 가까웠다. 이 때 보스니아에는 누가 있었는가?

반 쿨린Ban Kulin(1180-1204, 그렇다. 정치지도자, 지배자를 의미하는 Ban은 크로아티아와 똑같은 의미로 사용됐다.)이 태평성대를 열었다고 한다. 전설의 주인공이지만 단순한 신화적 존재는 아니었다. 오늘날 두브로브닉인 라구사 공화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고, 어떤 통치술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있는 동안 전란이 없었다. 그 뒤에 나타난 코트로마니치Kotromanić 집안는 지역의 반Ban으로서 이태리, 라구사, 베니스, 헝가리 등과의 외교를 통해 존재를 알렸다.

하도 교회문제로 바깥에서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으니까, 이 집안의 스톄판 2세Stjepan Kotromanić II(1322-1353 재위)는 공개적으로 카톨릭임을 선포하고 프란시스코회 수도사들을 받아들였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는 14세기부터 프란시스코회의 유구한 전통이 이 때부터 만들어졌다.

그 다음  된 트브르트코Tvrtko(1353-1391재위)는 보스니아의 황금기를 만든 사람이다. 이름에서부터 슬라브어에 전형적인 모음결핍증후군(?)을 몸소 보여준 이 왕은 영토를 달마시아까지 확대하고 교역과 외교를 통해 왕국의 기반을 다졌다.

비슷한 시기에 세르비아의 네마냐Nemanja 왕조가 인근 라슈카 지역에서 일어나서 경쟁을 할 법도 했지만, 당시 세르비아 왕조의 주된 관심은 비잔틴 방향이었기 때문에 양대 세력이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다. 1389년 세르비아 호족의 대표격인 라자르가 코소보 들판에서 오토만과의 회전을 준비하던 당시, 세르비아에 원군을 보낸 것도 이 트브르트코다. 이 트브르트코가 1377년부터 왕국을 선포하고 왕Kralj의 칭호를 쓰기 시작한다.

14세기 중세 보스니아 왕국의 확장세를 보여주는 지도. 서로는 헝가리 동으로는 오토만이 양강 구도로 압박해 오는 가운데도,  지역 내에서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확보했다.

산촌의 궁벽한 땅이긴 하지만, 이 때 당시 보스니아 왕조는 탄탄한 수입원이 있었다. 바로 광산업이었다. 독일의 광산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영토 내에서 납, 구리, 금, 은 등을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20세기 말엽의 인종학살로 유명한 스레브레니차Srebrenica는 은광산(Srebre는 '은'이라는 뜻)으로 유명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잘 발달된 카톨릭 클러스터가 있었다.

문제는 트브르트코가 죽고 난 1390년대 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부 권력다툼에 베니스, 헝가리, 오토만 등의 외세가 개입하면서 정세가 급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헝가리에 붙었다가, 오토만과 협력하는 등 왕가 혹은 호족들이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464년 보스니아 왕가는 오토만에 군사적으로 완전히 항복한다.

'보스니아는 속삭임 속에 쓰러졌다'라는 말이 있듯이, 왕가의 멸망 전후사정, 구체적인 전투, 각 호족의 세력관계 등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크로아티아는 일찌감치 헝가리 왕을 받아들였고, 세르비아가 그 얼마 전인1459년  완전히 망했으니까, 남슬라브족 누구 치고 본격적으로 왕국을 받들은 족속이 없게 되는 셈이다.

2012년 투즐라 중앙공원에 세워진 트브르트코왕 기념동상. 무슬림들이 다수를 이루는 투즐라에 세워졌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트브르트코는 독립 보스니아의 상징이다. 때문에 기독교를 믿은 지배자이지만, 독립 보스니아를 지지하는 무슬림들의 이 양반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듯 하다.  90년대 유고내전에서도 무슬림들이 초승달 문양이 아니라 백합 문양(fleur de lis)을 엠블럼으로 활용한 것도 그것이 바로 트브르트코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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