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9일 목요일

유고 삼국지 11 : 갈려지는 승패

연합국이 체트닉에서 빨치산으로 파트너를 바꾸기로 하면서, 덩그라니 홀로 남겨진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닉. 뭐라도 해야했다. 1944년 1월 세르비아 바Ba에서 나름 전국적 규모의 회의를 개최했다. 왕조를 존속하되 '민주주의'와 '연방주의'를 가미한 선언문이 나왔다. 하지만 반향도 작았고, AVNOJ 2차 회의의 짝퉁처럼 보이고 말았다. 무엇보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가 가지고 있는 다민족적 절실함이 없었다.

전쟁 초기부터 미하일로비치에게 파견된 영국의 군사사절단은 1944년 체트닉의 부역혐의를 들어 철수했다. 이들이 철수하면서 지금까지 체트닉들에게만 제공됐던 보급도 끊겼다. 하필이면 전황이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시점이다. 이 때 만을 기다려왔던 미하일로비치로서는 뭔가 아다리가 안맞아도 한참 안맞았다. 대기전술의 한계인가, 기회주의의 응보인가 아니면 연합국이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한 것인가. 8월에는 왕까지 그를 최고사령관 지위를 박탈했다.

연합국의 공식 파트너가 된 티토는 영국 등으로부터 6만톤에 달하는 보급품을 공수받았다. 안면을 바꾼 처칠, 이제는 카라조르제 왕가를 대하는 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20대 젊은 왕을압박해서 티토를 내각에 임명할 것을 압박한다. 물론 영국이 무작정 왕가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조리돌림한 것은 아니다. 왕가가 어떻게든 빨치산과 정치적 접합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터. 하지만 티토는 아쉬울 게 없었다.

1944년 10월 빨치산이 드디어 베오그라드를 입성했다. 아무리 사회주의 조국에서 왔다고 하지만 인근에 도착한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선수를 빼앗길 순 없었다. 탱크나 야포. 기계화된 근대전을 치루기에는 턱없이 수준이었지만,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 가면서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그 다음 달인 11월에는 영국에 거처한 임시정부가 그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심지어 페타르 왕은 '빨치산에 협력하지 않는 자는 모두 반역자'라는 내용의 방송까지 내보냈다. 하지만, 티토는 왕가에 대해서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44년 10월에 해방된 베오그라드. 퍼레이드 중인 빨치산. 소련군이 중화기를 지원해줬지만, 빨치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어떠랴 개선군의 입장이다.

전황이 이렇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그레브에 거처한 우스타샤 수뇌부들의 계산 속도 바빠졌다. 44년 7월, 파벨리치는 연합국과의 공모를 통한 쿠데타 혐의를 들어 몇몇 동지들을 처단했다. 이 때 쯤 들어 NDH 대열 안에 있는 누구에게나 상황은 분명해 졌다. 이대로 갈 수는 없다는 것이... 당연히 우스타샤 대열에 속해있던 상당수가 빨치산으로 편을 바꿨다.

1945년 봄이 되자,  빨치산이 크로아티아 동부 슬라보니아 평원을 강하게 압박했다. 산악지대에서 펄펄 날던 빨치산들도 평지에 내려오자 이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빨치산도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지만, 독일 입장에서는 한번 맛이 간 전황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5월 들어 독일군은 크로아티아내 모든 추축국 군 작전권을 파벨리치에게 양도했다. 파벨리치로서는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빨치산이 이미 자그레브에서 50km 떨어진 카를로바츠까지 진격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틀 뒤인 5월 8일 그는 가족을 데리고  슬로베니아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도망갔다. 그리고는 다시 이태리로 운신했다가 아르헨티나로 망명한다. 남미에서 몇번의 암살위기를 모면하고 1938년 스페인에서 병사했다.  2차대전 전범으로, 병상에서 죽은 얼마안되는 사람이다. 크로아티아를 탈출하는 데는 교황청이 도와줬다는 말도 있고 아직도 미스테리다.


크로아티아 모처에서는 요새도 해마다 안테 파벨리치를 위한 미사가 열린다. 유태인 단체가 반대성명을 내지만, 크로아티아 신부님들은 묵묵하다. 이 죄많은 사람을 용서해달라는 뜻일까? 물론 반대시위도 열린다. '야세노바츠에서 2만명의 아동이 죽었고, 우스타샤 수용소에서 죽은 인물들만 20만명. 모두 파벨리치가 명령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2013년 일이다. 이런 걸 보면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도자가 이렇게 가족 만을 챙겨서 도망간 사이에 남아있는 우스타샤 잔당을 비롯해서 NDH 추종자들 역시 도주길에 올랐다. 빨치산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말이 안됐다. 그래도 빨치산보다는 연합군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오스트리아로의 월경을 시도하다, 여단 급의 영국군을 만났다. 협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국경 바깥에 수용된다'는 조건으로 영국군에 항복하고 고스란히 무장해제까지 했다. 하지만 이들을 태운 기차는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다시금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갔다. 속은 것이다. 빨치산의 손에 다수가 죽고 상하고 그 결과는 '블라이부르크 학살극'Bleiburg Massacre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2차대전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났던 다수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의 시종과 희생자수는 제대로 밝혀진게 없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사건으로 20만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까지는 아니고 한 3만명 정도가 희생되지 않았겠나들 보고 있다. 영국군의 행동 자체는 어차피 국제법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 빨치산도 총격을 가했지만, 항복과정에서 발생한 오해가 있었다는 등 아직도 논란은 해소되지 않고 있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빨치산들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세력이 해외로 나가서 임시 또는 망명정부가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 그리고 어차피 우스타샤와 빨치산 사이에서는 제네바 협정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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