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1일 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4 : 오토만의 내습

요즘 크로아티아 텔레비전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는 다름아닌 터키산 대하 드라마 술레이만 대제Suleiman Veličanstvo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이 이야기하기를, 이 드라마를 보면서 크로아티아가 터키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수 있다고들 한다. 터키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터키말에서 간간히 나오는 간투사들 Baš, Zar, Barem 등은 크로아티아어내에도 굳건히 자리 잡은 단어들이다. 정작 크로아티아는 오토만 터키의 완전한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역설적으로 무력으로도 크로아티아를 들어올 수 없었던 터키는 21세기가 되어 드라마로 크로아티아 안방까지 들어온 것이다.

술레이만 대제의 터반 위용 : 사물을 그리는 것을 기피했던 이슬람 전통을 벗어나 베네치아의 화가가 그린 초상화다. 이 때는 서구의 제국들이 오토만에게 알랑거렸다.

헝가리의 지배를 받으면서 여러가지 다사다난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크로아티아인들의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자극을 준 것은 역시 오토만 제국의 서진이었다.

헝가리는 종교적으로 카톨릭을 신봉했으므로 일상적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살아오는 방식을 바꿀 만한 근원적인 차이점이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을 신봉한 오토만 터키는 크로아티아에는 존재론적 위협이었다. 게다가 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들 사이에는 오랜 적대의식이 쌓여있던 상황 아니었던가.

13세기 아나톨리아에서 발흥한 오토만 터키는 야금 야금 비잔틴의 영지를 침식해 가면서 세력을 확장하더니 14세기에 세르비아 왕국을 밀어버리고, 15세기에는 소리소문 없이šaptom pade bosna 보스니아를 병탄했다.

이제 갈길을 막는 것은 헝가리(크로아티아 포함)였는데, 1493년 첫번째 조우에서부터 여지없이 오토만 세력에 밀리기 시작했다. 16세기 초에는 자그레브 부근에까지 오토만 군사들이 들락거렸으며, 헝가리의 영웅 마쨔쉬왕Mathias Corvinus와 야노쉬 훈냐디Janos Hunyadi가 잠시 오토만의 서진을 성공적으로 막았지만, 그것도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의 일이었다.

1519년 로마의 교황 레오 10세는 크로아티아를 '기독교 문명의 보루'Antemurale Christianitatis라고까지 칭했다. 하지만 욱일승천의 오토만 터키를 막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으니, 1520년에 즉위한 술레이만 대제는 헝가리는 물론 서구문명 자체가 상대하기 어려운 '걸물'이었다. 1526년 술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터키군과 헝가리 군이 모하치Mahacs에서 대치했고, 그 결과로 헝가리의 왕이 전사하는 최악의 참패를 겪었다. 이로 인해 헝가리 왕국은 붕괴되고, 헝가리 민족에게는 이 때가 (안좋은 방향으로 가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모하치는 헝가리 속담에도 들어가, 최악의 상황에 비견되는 상투어가 됐다.(아무리 상태가 안좋아도 모하치 때보다는 낫다는...)

이러한 차제에 크로아티아와 헝가리가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길은 결국 옆나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1533년에는 크로아티아 의회Sabor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Ferdinand를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옹립하면서 어떻게든 오토만의 진군을 막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16세기 내내 영토를 잠식당했으며, 크로아티아인들의 집단이주가 줄을 이었다. 그 결과 슬라보니아 평야와 달마시아의 상당부분이 터키 제국의 영토가 된다.

1500년경 유럽의 판도 : 발칸이 어느덧 오토만 터키의 영토가 됐으며 이를 막아선 것이 헝가리다
* 자료원 : http://www.euratlas.net/history/europe/fr_index.html

오스트리아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도입한 것은 터키와의 접경지대에 군사특별구Vojna Krajna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의 대량 피난으로 인해 만들어진 지리적 공백에 누구나 와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주되, 관할권을 크로아티의 귀족들이 아닌 황제 직속 군사령관에게 줬다. 워낙에 언제 침략당할지 모르는 열악한 땅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는 면세혜택을 내리는 대신, 언제든지 오스트리아가 주민을 군인으로 차출할 수 있는 권리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헝가리인이던 독일인이던 크로아티아인이던 누구나 다 정착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땅에는 오토만 통치를 피해 도망나온 세르비아인들이 눌러살게 됐다. 군사특별구는 나중에 크로아티아 역사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 주민간의 사이가 나빠지게 된 단초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크로아티아인들 입장에서는 원래는 자기 땅인데 다른 민족이 와서 살면서 귀족들의 관할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또 면세혜택으로 나름대로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을 것이다. 세르비아인들 입장에서는 오토만의 서진을 막아주고 있다는 자의식에 새로운 뿌리 의식이 결합되면서 자신을 어떻게든 지배하려는 크로아티아인들의 입장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오토만은 앞으로 500년에 걸쳐 남동유럽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흔히 다뉴브 이남 남동 유럽 지역을 발칸반도Balkan Peninsula라고 부르는 데, 발칸이라는 말도 터키말로 숲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칸 하면 발칸포Vulcan 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데, 그런 무식한 이야기는 여기와서 안했음 좋겠다.) 오토만의 직접적 지배를 받지 않았던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발칸이란 말에 대해서 거부감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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