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5일 토요일

보스니아 유사 12 : 얼떨결에 유고슬라비아

정작 사라예보에서 1차대전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지기는 하지만, 대전 내내 보스니아는 전쟁의 참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1차대전 오스트리아의 전세가 기울어 가는 데에도 보스니아는 전반적으로는 커다란 소요가 없었다. 다만 전시경제 하에서의 곤궁함은 지속됐다.

1차대전이 독일-오스트리아에 점점 불리하게 흐르면서 남슬라브 제민족을 하나로 묶는 유고슬라비아 운동이 정치적 설득력을 더 얻어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패전 무드가 무르익는 가운데 크로아티아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에서도 '국민회의'National Council가 형성됐고, 허망하게 도시를 떠난 제국의 관료들을 대신해서 권력을 이어받았다.

곧이어 세르비아군이 진주했고, 일부 유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 간의 갈등으로까지 격화됐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세르비아계들은 환희용약했다. 드디어 대세르비아가 실현되는 때였으니까. 세르비아 본토에서 건너온 군인들 입장에서는 오토만 터키의 잔재인 무슬림들을 어떻게 해보고 싶었을 수 있다. (실제로 이 때 세르비아 인사 중에는 무슬림들의 강제개종을 주장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1912년 발칸전쟁 때 잔학한 인종청소로 인해서 '야만인'으로 악명을 떨친 세르비아로서는 애먼 무슬림들을 쫓아낼 도덕적 명분도 없었거니와 국력도 고갈된 마당이었다.

어쨌거나 보스니아도 역시 얼떨결에 남슬라브의 일원으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에 편입됐다. 보스니아가 원래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무슬림들로 이뤄진 곳이다 보니, 대충은 맞는 국호이긴 하다 하지만, 무슬림들로서는 꺼림직했다. 난 도대체 누구야?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스스로가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민족 둘 중의 하나일꺼라는 막연한 생각은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를 기해 무슬림들 간의 독자적 정치조직화가 이뤄졌다. 1919년 2월에는 사라예보에서 '유고슬라브 무슬림 기구'Yugoslav Muslim Organization이 만들어져 유고슬라비아 왕정시대 무슬림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거의 독점적으로 대표했다. 초반에는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를 하나의 목소리로 통합해 낸 사람이 바로 메흐메드 스파호Mehmed Spaho다. 이 사람의 주장인 즉 보스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정치체제 하에서 독자적 정체성과 자치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흐메드 스파호의 모습. 비엔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았다. 하지만, 두 동생 중에 하나는 세르비아계로 다른 하나는 크로아티아계로 천명했다. 한마디로 민족문제와 관련해서는 무슬림들의 입장은 애매하고 모호했다.

메흐메드 스파호의 정치적 입장은 민족이건 아니건 그 이후로도 무슬림들의 전통적 자기주장이 됐다. 하지만 보스니아로서의 통합성은 여전히 난제였다.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언제든 기댈 언덕이 있었지만, 무슬림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중간자적 입장, 국외자적 정치적 토대는 새로 형성된 왕국에서 희한하게 먹혀들어갔다. 일종의 캐스팅 보트 권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국의 근간을 이루는 1, 2민족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계 사이에서의 알력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결국 세르비아 왕가에서 크로아티아 쪽의 손을 들어줘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간의 대협약Sporazum이 형성됐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난제였다. 이 협약에 따르면 보스니아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에 반분되는 결과가 나온다. 유력 무슬림 정치인들이 이에 반대했지만, 되돌릴 힘이 없었다. 메흐메드 스파호도 1939년 대협약이 막바지 협상단계에 들어섰을 때  죽었다.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건 아닌 듯 했다.


그러나 보스니아의 내일이 어떻게 됐건, 시간은 급박하게 흘렀다. 대충 뭔가 정리될 시간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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