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2 : 산 속의 생활

15-6세기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오토만의 물결을 피해서 산으로 달아난 몬테네그로인들. 산으로 들어가고 보니 사방이 막막했다. 디나릭 알프스 자락의 산악 지형은 카르스트 암반 위주의 지형이다. 몬테네그로에는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남은 돌덩어리들을 이쪽지역에다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당연히 거칠고 황폐하다.

코토르 만을 둘러친 몬테네그로의 산들. 물가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만, 산위는 보기는 좋지만 살기는 영 아니다. 몬테네그로인들이 19세기말까지 산에서 내려오질 못했고 이들 해변 도시를 제대로 접수한 것 역시 20세기 전후의 일이다.

이런 산속에서 최후까지 반 오토만 전선의 선봉이었던 이반 츠르노예비치도 몇 년 살아보다가, 15세기 말 베니스로 투항했다. 츠르노예비치의 후예로 이반의 세째 아들 스타니샤Staniša는 아예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오토만 술탄의 대리자로서 지역을 군림했다. 그러나, 지역에 뿌리박은 호족으로서가 아니라  행정관료로서였다.

산속에서 지배계급이 없어진 만큼 몬테네그로 인들의 생활에도 커다란 변화가 왔다. 억센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들도 그만큼 억세어지지 않으면 안됐다. 그렇다고 개개인으로는 생존이 어려웠던 만큼 대가족을 중심으로 한 부족들이 나타났다.

목축업이 주요 생활수단이었지만, 이것 역시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산아래로 내려와서 약탈로 호구지책을 삼았다. 주된 약탈의 대상은 주로 어느정도 윤택했던 무슬림 대갓댁이었지만, 부족들 끼리도 목축지를 둘러싸고 험한 싸움이 지속됐다.

위의 그림은 산 아래를 내다보는 몬테네그로 전사의 모습. 마초들이 다스리는 남성우위사회다.  고산지대를 배경으로 강팍한 스파르타 생활을 영위했으니까 가히 하이랜더라 할만 하다.

누군가 나의 원한과 원망을 풀어주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  줄 중앙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정의는 부족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됐다. 때문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룰이 금과옥조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룰은 부족간의 쟁패를 불식하기는 커녕 더 확산시킬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산 아래는 오토만이라는 강적이 있지 않은가?

해서 부족간의 분규 해결이나 쟁송 협의를 위해서 부족회의Opšti Crnogorski zbor가 구성됐다. 오늘 날 의회와 같은 역할이라고 보면 되려나? 또 누군가 불편부당한 사람이 중심을 잡아 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블라디카Vladika, 부족간 회의를 통해서 선출된 지역 정교교회의 수장이다. 영어로는 Prince-Bishop으로 번역되는 데, 만약 번역 그대로라면 고대국가 형성 이전의 제정일치 또는 신정합일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세금 제도가 없다 보니 중앙집권적 정부가 나올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오토만에 먹히던 내분으로 망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온 방책이었다. 어느 누구에게 이런 권력을 몰아주기는 어려우니 어느정도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던 종교인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카가 받은 권력이라는 것 역시 실제적 물리력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블라디카의 궁극적 역할은 군사지도자이자 중재자였다. 군사지도자라 함은 오토만에 대한 군사지도자, 중재자라 함은 부족간의 알력을 막는 타협의 매개체 역할인데, 말 안듣는 족장에게는 '파문' 으름짱을 놓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길이 없었다.

몬테네그로 산중의 생활. 터키식 칼 야타간과 총을 찬 남자들의 무대였다. 이들에게 '무장해제'란 '거세'와 비슷한 어감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19세기까지 몬테네그로의 정치체제는 정교일치였다고 하지만, 오늘 날의 이란에서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정치적 리더로서의 블라디카의 권력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봉건 영주가 없는 무계급 사회에서 개별 구성원들은 모두 자유인이었다. 산에서 사는 만큼 삶은 강팍해졌지만, 개인을 찍어누르는 계급은 없어진 셈이다. 무정부적 자유주의자들의 연합. 이것이 몬테네그로 산중생활의 실체였다. 이 같은 생활양식이 18-19세기 서유럽의 낭만주의적 영감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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