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3 : 리더의 탄생과 시대의 개막

산속에 처박힌 몬테네그로인들. 코토르를 비롯한 바닷가는 베네치아인가 평야 지역은 오토만의 지배체제가 들어앉았다. 몬테네그로는 이 두 세력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사실은 그 두세력이 산으로 까지 굳이 쫓아들어가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16세기 베네치아와 오토만 터키는 과거 츠르노예비치 가문의 땅이 온전히 오토만의 것임을 합의했지만, 츠르노예비치의 마지막 농성장소인 체티녜를 중심으로 다단한 부족과 씨족들이 살았다. 삶은 단순했다. 국가도 없고 세금도 없다. 귀족도 없고 농노도 없다. 이것이 바로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 부족pleme(tribe), 씨족bratsvo(clan) 등의 단어가 근세까지 살아서 남아있게 된 연유다.

하지만, 정치적 리더가 없는 사회라는 것은 지극히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오토만과 같은 강대한 적이 있을 때는. 그래서 산중의 부족들이 모여서 지도자를 뽑았다. 누구에게도 불편부당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가 블라디카Vladika라는 직함을 가지게 됐다. 정치적 스킬도 있어야 하지만, 군사적 카리스마도 있어야 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얼굴도 잘생기고 키고 큰 사람이면 더욱 좋다.

블라디카 다닐로의 모습. 당연히 직접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후세에 보다 로만틱하게 각색한 그림이다. 정교 승려라기 보다는 댄디한 군인처럼 보인다. 군사지도자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이렇게 그려도 틀린 것 만은 아닐 것이다. 

블라디카를 중심으로 몬테네그로는 초록동색 베네치아와의 연합을 통한 오토만 군과의 대항전선을 만들었고 베네치아와 오토만 사이에서 일어난 다단한 전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베네치아가 항상 믿을 만한 것은 아니었고 오토만과 항상 적대적인 것도 아니었다. 시세와 풍향에 따르는 잡초와도 같은 삶이다.

그러나 17세기를 기점으로 오토만이 기울기 시작했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던 베니스 포위(1683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산속의 바람도 슬슬 동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녜구시Njeguši족 페트로비치Petrović 집안의 25살짜리 승려 다닐로Danilo가 블라디카에 선출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1697). 오토만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과 야망이 있었다. '체티녜 주석 블라디카 겸 세르비아의 령(!)도자' Vladika of Cetinje and Vojvodić of Serbian Land. 그의 (자칭) 공식 직함이었다. 왕성한 활동력을 바탕으로 한 다닐로는 몬테네그로사에서는 지금까지 없던 두가지 유산을 남겼다.

그 하나가 바로 러시아와의 관계...

때마침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가 함대 구축, 부동항 건설을 국가적 목표로 내놓고 뛰어다닐 때다. 항해술 습득을 위해 청년 장교들을 서방으로 보낼 때, 베네치아가 관리하던 코토르Kotor에도 몇사람 보냈다. 이곳에서 이들은 산중에서 동방정교를 신봉하는 호전적인 부족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여기에서부터 몬테네그로와 러시아 간의 관계가 시작된다. 동일한 정교를 신봉하는 데다 오토만과도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신흥강대국 러시아에 몬테네그로가 홀딱 빠졌다. 이러한 전통이 있어서일까 몬테네그로의 러시아 숭배는 거의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관계를 처음으로 열어나간 것이 다닐로였다. 블라디카 다닐로는 러시아로부터의 원조를 바탕으로 몬테네그로 전사들의 화력과 더불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몬테네그로 부족들의 유일한 생명줄 노릇을 해왔던 베네치아가 가만히 만은 있을 수 없었다. 원래 인연이 있던 족장들을 초치하고 그 중 대장급에게 지사guvernadur의 명함을 달아줬다. 이간책이었다. 다닐로는 정치적 수완으로 이같은 외세의 개입을 교묘하게 무력화한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뜨는 해라면 베네치아는 지는 해였다. 표트르 대제를 중심으로 오토만 못지 않은 국토확장을 추진하는 러시아, 그리고 지중해 무역의 위상이 옛날같지 않은데다 곧 있으면 나폴레옹에게 망할 베네치아.

또 블라디카직의 세습...

다닐로 때부터 블라디카 직이 다닐로가 속해있던 페트로비치 씨족에만 전승되는 전통이 생겼다. 다닐로의 카리스마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사는 정교 승려의 신분에 후사가 있을리가 없다. 그래서 조카가 이어받는 것으로 결정됐다. 세습군주는 아니지만, 어느 집안을 구심점으로 중요한 정치적 권력이 전승된다는 것은 이제까지 민주적 부족사회의 전통과는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집중되고 집약되기를 바라는 권력의 구심력이 어디선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블라디카에게 없던 권력이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었다. 산중의 부족장들은 여전히 말을 안들었고 이들에게 다닐로가 할 수 있는 것은 '파문'이라는 위협과 협박 뿐이었다.

17세기 벽두에 다닐로가 건립한 체티녜 수도원Cetinjski manastir. 옛날 츠르노예비치 왕가가 만들었다는 수도원 터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오토만이 대군을 끌고 체티녜를 들이닥치는 바람에 여러번 불탔지만, 그 때마다 다시 세웠다.  페트로비치 가문의 또다른 성자 페타르의 유골이 봉헌된 곳이기도 한 만큼, 몬테네그로의 정신적 중심이라 할 만 하다. 

오토만과의 다단한 전투를 통해 명성을 구축한 블라디카 다닐로가 워낙 뚜렷한 인상을 남겼던지 몬테네그로의 후세는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학살'Christmas Eve Masacre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1702년에 일어났다는 이 사건은 다닐로의 명하에 마르티노비치Martinović 가문의 다섯 형제(와 그 권속)들이 무슬림 (배교자) 마을을 찾아가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사건의 역사적 진위는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적어도 후세 몬테네그로인들은 이를 통해 다닐로를 더욱 살갑게 기억했다. 이 사건을 두고 만들어진 서사시도 여러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중에도 나오지만 몬테네그로 국민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중화환Mountain Wreath이다.

어쨌거나 다닐로를 기점으로 근대 국민국가로 나아가고자 하는 몬테네그로의 새 시대가 열렸다. 물론 다닐로는 이 역사적 길목에서 스스로를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포지셔닝했다. 이 같은 정체성이 어떻게 몬테네그로라는 별도의 지향점으로 빠져들었는가가 역사의 미묘한 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