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1일 토요일

유고 삼국지 10 : 인생역전

43년11월에 개최된 2차 AVNOJ 회의는 어떻게 보면 연합국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도발이었다. 영국이 이미 세르비아 왕가와 망명정부를 품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과의 연관성을 전면 부정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스탈린으로서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섣불리 사회주의 정권의 뒷배를 대다가 동맹간의 신뢰를 흔들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유고공산당이 소련의 지령을 충실히 따르는 모양새였다면, 43년 2차회의는 지령에 의하지 않고 유고공산당 독자적으로 만든 이니셔티브였다.
"우리 사고쳤다. 니들 어쩔래?"

빨치산을 국제적으로 인정하자는 제안을 처음 꺼냈던 것도 스탈린이 아니라 처칠이었다. 영국의 보수정치인이 공산당 주도 빨치산을 밀어준다는 것. 2차대전과 같은 화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일찌기 소련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던 매클린은 볼셰비즘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빨치산을 지원하면 전후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처칠에게 전했다. 처칠이 그런 매클린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네, 거기서(유고슬라비아) 쭈욱 살라구?"

전쟁 목적에 대한 순수한 집착이 보인다. 처칠은 그런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매클린은 이 때 티토와 만들어놓은 인연으로 나중에 코르출라에 집을 마련했다. 아이러니다.

한편 이 같은 결정을 두고 2차대전 후에도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빨치산에 파견했던 디킨과 매클린은 영국 최고의 엘리트들로 처칠과의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반면, 같은 시기에 미하일로비치에게 파견했던 인사들은 그저그런 학벌과 집안 사람들이었다. 처칠은 테헤란 회의에 참석하기 이전에 디킨으로부터 대면보고를 받은 반면, 미하일로비치 측에 파견된 사절단의 보고서는 읽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유고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것을 두고 디킨과 맥클린이 처칠의 안목을 가렸다는 후세의 비난이 있었다. 하지만 처칠은 이미 사절단을 파견하기 전부터 빨치산과 체트닉의 활동 동향을 독일측 암호문 해독을 통해 현지 상황을 충분히 입수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굳이 사절단을 보낸 것은 과연 빨치산을 주도하는 유고공산당이 말이 통하는 사람들인지 알아보려는 사후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943년 말, 테헤란에서 만난 연합국 영수 3인. 여기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주도 빨치산이 처음으로 연합국사이에서 의제로 제시됐다. 처칠이 이야기를 꺼냈고, 스탈린은 표정관리 중이었고, 루즈벨트는 내 알바 아님.


매클린과 디킨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접수한 처칠은 1943년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의 영수들, 즉 루즈벨트와 스탈린에 빨치산 이야기를 꺼낸다. "이 사람들, 도와줘야겠다"는 이야기였다. 나찌를 패퇴시켜야 한다는 연합국의 이해타산에 카라조르제 집안, 망명정부,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닉 모두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반면에 전쟁전까지 만 해도 뭐하나 봐 줄 것 없던 공산당이 1943년에 건국세력이 됐다. 초년 역마살 고생, 일부 횡액수에도 불구, 계미년 들어 서방에서 귀인을 만나서 운수대통. 이것이 티토의 사주팔자였던 것 같다.

하지만 티토로서는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44년 5월 말경 보스니아 산동네 드르바르Drvar에 짱박혀 있던 티토의 산채에 독일 낙하산 부대가 들이닥쳤다. 빨치산 역사가들은 이것을 독일의 7차공세라고 명명한다. 아슬아슬한 탈출로 또 다시 위기를 모면한 티토는 그해 8월 이태리에서 처칠을 만난다. 영국의 지원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패셔니스타 산적두목과 노회한 노정객의 만남.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과 어울려 놀던 처칠의 편안한 태도와 긴장한 듯 각잡힌 티토 모습이 대조적이다. 1944년 8월 15일 나폴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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