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4일 일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 : 민족, 왕국, 그리고 제국

유고슬라비아라는 한지붕에서 살았던 다른 민족으로는 크로아티아 말고 세르비아 인들이 있다. 사실 어쩌다 크로아티아 옆에 붙어사는 민족처럼 들리지만, 사실 구유고에서 인구수로 따지면 세르비아 인들이 제일 많다. (2011년 현재 크로아티아 약 5백만, 세르비아 천만 가량?) 세르비아인들은 스스로를 발칸의 호랑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하는 등 지역내 맹주의식이 강하다.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차이가 거의 없는 같은 말을 쓰기 때문에 사실 이들을 다른 민족으로 봐야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민족의 자각이 왕성하게 일어나던 18세기 말 19세기 초 크로아티아(류데비트 가이Ljudevit Gaj)나 세르비아(북 카라지치 Vuk Karadžić)의 민족 선각자들은 양측에서 모두 언어로 민족을 정리해 나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서로를 다른 민족N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가장 눈에 들어오는 차이점은 양 측이 서로 다른 버전의 기독교를 믿었다는 점. 하나는 카톨릭, 다른 하나는 동방정교. 그런데 그것이 서로의 선을 가르고 니편 내편 따질 이유가 되나?

기질 상의 차이도 있다. 세르비아인들은 90년대말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이 살짝 언급한 바, '발칸의 격정 Passion'의 진앙지였다.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의 영화 Underground를 본 사람들이라면 느낄 수 있듯이, 놀기 좋아하고 정열적이다.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도회의 영향을 받아 차분한 서울 다마네기라면 세르비아 사람들은 훨씬 격정적이다. 즉흥성도 강하고 변덕도 있지만, 친해지면 더 없이 괜찮은 사람들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스스로를 쓰릅Srb이라고 부른다. 모음을 찾아볼 수 없는 이 민족의 명칭은 나라에 적용되면서 쓰르비야Srbija가 됐다. 그것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세르비아Serbia가 된 것이다. 간혹가다 스페인의 세빌랴Sevilla 와 헷갈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는 세르비아에서는 이발사를 찾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크로아티아인들과 얼추 비슷한 시기에 발칸지역으로 찾아든 이들은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체 형식으로 살다가 11세기 경부터, 라슈카Raška 지역(오늘날 세르비아내 산작지역)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정적 계기는 1160년대 스테판 네마냐Stefan Nemanja가 왕조를 형성하고 발칸 지역을 중심으로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네마냐 왕조는 그저 오고 가는 왕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여러 면에서 세르비아 역사에서 굵은 획을 그었다.

가장 뚜렷한 획은 세르비아라는 국체를 역사에 각인했다는 것이겠지만, 사실 이들의 영속적인 영향은 정치적인 부분보다는 문화적인 데 있었다.

가장 획기적인 점은 스테판 네마냐의 세째 아들이 정교의 사제로서 그리스 아토스산에서 오랜 수행 끝에 획득한 법력(!)을 바탕으로 비잔틴 교회로부터 세르비아 정교 독립권Autocephaly을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사바는 세르비아 역사에서 최초의 총대주교patriarch가 되면서 세르비아 교회의 전통을 세웠으니,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성 사바Saint Sava다.

아버지 스테판도 이 아들의 감화를 받아 출가하고, 남은 두형제 간 후계싸움도 이 사람이 말렸다고 하니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형제 간의 싸움을 말리고 왕조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는 것은 세르비아 역사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는데, '오직 단결만이 세르비아인을 구한다'Samo Sloga Srbina Spašava라는 구호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정교가 만나는 지점이다. 더 나아가 세르비아 정교는 오토만의 500년 지배 기간 중 거의 유일하게 남은 사회제도Institution로 세르비아의 정체성을 지키는 구심 역할을 했다.


세르비아 십자가의 모습이다. 십자를 중심으로 한 네개의 분면에 총 네개의 키릴 문자 C(음가는 'S') 도안이 배치되어 있다. 바로 Samo Sloga Srbina Spašava (Само Слога Србина Спашава) 구호의 첫음절들이다.

잘 되는 집안은 무엇을 해도 잘된다고 네마냐 왕조는 그 이후로도 번창을 거듭했는데, 특히 독일에서 광산기사들을 영입해서 금, 은, 납, 구리 등을 채굴하면서 상당한 재력을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지배영역을 넓혀 갔다. 특히 이들은 거점인 코소보 지역에 데차니, 그라차니차 등 국력을 총화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었는데,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를 민족의 발상지처럼 여기는 것 역시 무리가 아니다.

그러다 14세기 들어서 두샨Dušan이 스스로 황제(짜르, Car)라고 칭할정도 세력이 커졌는데, 다뉴브 강에서부터 에게해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역을 세르비아의 통솔하에 편입시켰다.

<네마냐 왕조의 최전성기 1350년 경의 발칸 지도 : 북쪽으로는 헝가리, 서쪽으로 보스니아가 위치하고, 동쪽으로 불가리아, 비잔틴제국, 남쪽으로 십자군 원정의 결과로 생긴 카톨릭 아테네공국, 아체아 공국 등이 보인다>
자료원 : http://imgur.com/r/MapPorn/WJcYFgR

그러나 두샨에게는 아버지 스테판 데찬스키Stefan Dečanski를 왕위에서 쫓아내고 2달 만에 목 졸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도덕적 흠결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다수의 성자를 배출한 네마냐 왕조에서 두샨이 성인으로 추존되는 데 결정적 결격사유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 같은 결격사유와는 별도로 이 오래전 두샨의 궐기는 세르비아 민족의 지향과 비전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줬다. 이러한 화려한 과거는 구 유고 국가들 중에서 세르비아 만이 지니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왕년에 말이지~하는 자존심? 야성, 야심, 야만. 좋던 나쁘던 세르비아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뭉쳐져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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