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5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11 : 1914년 운명의 날

1878년 합스부르크 황가의 보스니아 통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가운데, 둘 사이에 놓인 무슬림들. 무슬림들도 스스로를 누구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는 상황이다.

사뭇 팽팽하게 돌아가던 팽이에 다른 각도에서 스핀이 들어왔다. 1908년 터키 본토에서 '청년 터키' Young Turk 쿠데타가 일어났다. 젊은 군인들이 술탄을 압박해서 근대적 의회주의에 근거한 입헌군주국을 도모한 것이다. 오스트리아로서는 난제였다. 입헌군주, 의회, 다 좋은 데, 오토만 터키 정부가 법적 주권을 지닌 보스니아에서도 지역대표를 소집한다 치면 어쩔건가? 오스트리아 통치 지역의 대표들이 터키의 국회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지금까지 맘속으로만 간직하던 '합병'을 선포한다. 보스니아는 실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땅이 된 것이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 발표는 지역에서 일련의 정치적 소요와 위기를 야기했다. 흔히들 말하는 합병 위기annexation crisis가 바로 이것이다. 가장 흥분한 것은 세르비아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들이었다. 흉중의 대세르비아로 가는 길이 더욱 멀어졌기 때문이다.

각종 비밀결사와 혁명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스니아에서는 '청년 보스니아'Mlada Bosna 라는 이름의 복잡하고도 광범위한 배경의 학생운동 흐름이 형성됐다. 이들 학생들 중 일부가 세르비아 본토의 민족주의 단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사보타지, 폭탄제조 및 무기 사용법 등을 배웠다. 그 중의 하나가 가브릴로 프린찝이었다.

민족주의 청년의 초상. 가브릴로 프린찝Gavrilo Princip. 1912-13 발칸전쟁 때 세르비아 군에 자원했으나 '너무 병약하고 왜소해서' 복무를 거부당했다. 하지만, 제대로 큰 사고를 치는 데는 큰 체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암살 당시 미성년(20세 이하)이었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징역 도중 병몰.

이렇게 벌집 쑤셔놓은 듯한 보스니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드가 뜬금없이 방문한다. 당연히 열혈청년들이 암살계획을 세운다. 이들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날짜는 1914년 6월 28일, 성 비투스의 날Vidovdan.

암살범들의 아마추어리즘은 너무 명확했다. 황태자를 기다리던 암살자들은 모두 여섯명. 밀랴츠카 강변에 새로 조성된 길을 따라 시청으로 향하던 황태자 부부. 환영인파들에 대한 황실 서비스의 일환으로 무개차를 탔다. 기다리던 암살자1. 너무 떨려서 차를 그냥 보낸다. 조금 뒤의 암살자2는 좀더 대범했다. 수류탄을 던졌는데, 황태자는 무사하고 그 뒤를 따라오던 수행차량으로 떨어져 사상자가 나왔다. 암살자는 망명도생코자 그 자리에서 밀랴츠카 강으로 뛰어내리다가 발목이 접질렸다.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가족사진. 황태자는 나름 로맨티스트였던지 황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비깜이 아니었던 색씨과 결혼했다. 총을 맞고 부인을 부르면서, '애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살아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사는 것은 황가라고 다르지 않았던 듯.

소란 속에 얼마 안떨어진 시청까지는 도착했으나 황태자는 환영사고 축사고 공식일정을 소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수행원이 다쳤다니 문병이나 갈까? 그 자리에 있던 보스니아 총독이 말린다. 일단 숙소에 짱박히는 게 상책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최종 행선지가 1호차 운전수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다시 밀랴츠카 강변길을 내려가다 운전사는 황태자를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우회전을 튼다. 뒤에서 호통이 터졌다. '이봐 어디가. 거기가 아니지!' '어렵쇼. 여기가 아녀?' 차를 멈췄다. 바로 그 자리에 프린찝이 있었다. 무개차, 코 앞에 황태자 부부, 내 손에 총. 나머지는 역사가 됐다.

암살 직후 혼란통에 포착된 체포 장면. 쥐어터지는 프린찝. 시아나이드 독약을 깨물었으나, 불량품이었는지 그대로 토하고 잡혔다. '황태자 부부가 죽었다는 것' 빼 놓고는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암살 기도였다. 

황태자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나섰다. 그 책임을 놓고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통보했다. 이렇게까지 사태가 진전될 줄 몰랐던 세르비아로서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근 몇 년간 발칸 전쟁 등을 통해 영토를 넓혀가면서 한참 기세를 올렸지만, 국력으로나 어느 면으로나 자신의 몇 배나 되는 대제국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자.. 잠깐만.. 손들어 말리고 싶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민족의 화약고, 발칸이라는 악명은 이 사건으로 더 공고해졌다. 하지만 이들을 멸시하던 고아한 서유럽은 더 큰 야만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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