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6일 일요일

유고 삼국지 6 : 거래와 대장정

41년 겨울 공세를 기점으로 미하일로비치는 세르비아를 전전하다 이듬해 5월 몬테네그로 체트닉들의 거점으로 옮겼다. 도착하고 보니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신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몬테네그로에서는 체트닉들이 점령군인 이태리군과 오손도손 공생관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42년 몬테네그로에서 미하일로비치. 왼쪽의 인사는 영국 특작대(Special Operations Executive, SOE) 소속 빌 허드슨 Bill Hudson 대위다. 영국은 41년 9월 허드슨 요원을 미하일로비치에게 파견했다. JVO가 망명정부 하의 '합법적' 저항군이었기 때문이다. 미하일로비치는 자신이 연합군의 일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태리군, 지긋하게 말안듣는 몬테네그로를 혼자서 다스리자니 막막했다. 이태리의 원래 생각은 이랬다. 몬테네그로를 일단 독립시키고 이태리의 보호령으로 관리해주면 그럭저럭 지나가지 않겠는가라고.... 그러나 몬테네그로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일로 자존심 상한 몬테네그로 마초들이 41년 봉기를 일으켜, 이태리군 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몬테네그로의 꼴마초들, 과거 세기때의 기억이 남아있는지, 사람을 잡으면 반드시 신체를 훼손하는 버릇이 남아 있다. 코나 목이 없는 시체들을 보니 이태리군도 꼭지가 돌았다. 일단 봉기세력은 가혹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독일군 처럼 두당 몇명 식의 보복정책은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협력자를 구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파시즘의 철천지 원수니까 무시하기로 하고, 체트닉들과 손을 잡기로 한다. 체트닉들도 쌀한톨 안나오는 산속에서 지내자니 아쉬운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이태리가 도와준다고 하니 얼씨구나 하고 달라 붙었다. 이런 거래관계가 성립됐다. 체트닉들에게 탄약과 식량을 대주는 대신 공산당을 같이 몰아내고 더 이상 이태리군에 딴지걸지 말기. 도시지역은 이태리군이 시골지역은 체트닉들이 접수.

우리가 너무 다정했나? 이태리 장교와 사진을 찍은 사람(왼쪽)은 달마시아 지역의 체트닉 대장 몸칠로 주이치Momčilo Đujić. 이태리군과의 공생관계는 살자고 하는 짓이었지만,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에는 책잡힐 행동이었다. 직할대도 없고, 나눠줄 물자도 없는 미하일로비치로서는 이런 거래를 막을 수 없었다.

이런 관계는 몬테네그로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달마시아, 헤르체고비나, 이태리군이 진주한데서는 비슷한 거래관계가 만들어졌다. 덕분에 이태리군 점령지역에서는 세르비아인들에 더해서 덤으로 유태인들까지도 이태리군의 보호를 받게 됐다. 좋은게 좋았던 이태리인들, 아무리 파시즘 파트너이긴 하지만 나찌독일이 무슨 억하심정에 사람을 저리 험하게 대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덕분에 이태리군 진주지역은 유고 여타지역에 비해서는 개중 상황이 나았다는 평을 듣는다.
 
명색이 연합군의 일원인 미하일로비치는 이런 상황이 불만이었지만, 체트닉 대장들을 대놓고 면박하질 못했다. 살자고 하다보니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체트닉 대장들은 게다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보니, 우스타샤들의 폭주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의 보복을 추진하다보니 중간에 낀 무슬림들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미하일로비치는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거래나 행동 방식은 나중에 심각한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된다.

42년 1월 보스니아 동남부 포차Foča에 똬리를 튼 공산당. 아무래도 세르비아에서 제대로 된 민중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게 찝찝했던 지도부는 여기서 향후 봉기의 방향과 관련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즉 투쟁의 성격을 인민해방운동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런 개념까지 정립한 것은 좋았는데, 또 독일군, 우스타샤, 이태리군이 압박해 왔다. 일단 살아야 한다. 5월에는 포차에서도 쫓겨나와 목표를 보스니아 북서부 비하치Bihać로 잡았다. 논리적으로 거기 밖에 없었다. 일단 독일군과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만만한 체트닉이나 우스타샤를 주로 상대하면서 NDH 치하 보스니아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행정공백을 최대한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대장정도. 지도 우측 하단 포차(네모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좌측 상단의 비하치(네모안)까지의 장정로. 붉은색 화살표가 빨치산들의 행로인데, 행군이라기 보다는 거의 관운장 오관돌파다. 관우? 이 같은 유사경험이 있어서였는지, 중국은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와 할 말이 많았다. 요새도 중국 외교관들이 티토의 고향인 쿰로베츠Kumrovec를 곧잘 들린다고한다. 자그레브에서 그리 멀지않다.

이태리군과 독일군/우스타샤 간의 공백지대를 절묘하게 타고 북서쪽으로 걸어나갔다. 이것이 속칭 유고판 대장정이다. 총 이동거리는 300km에 지나지 않았지만, 컨셉이나 목적 자체가 중국공산당의 대장정과도 거의 동일했다. 산악지역을 타고 나가면서 보급도 해결해야하니까 여간 고단한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빨치산 개념 자체가 지역을 기반한 것이 아니니까, 부상자까지 데리고 다녀야 한다.

천신만고의 개고생이었지만, 이 대장정은 하나의 자산이 됐다. 특히 일반대중들에게 스스로를 부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공산당 지도부가 초기의 극좌적 오류를 시정하고, 점령군이나 우스타샤, 체트닉 세력에 대한 보호막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우스타샤들이 하도 분탕질을 치고 체트닉들의 가차없는 보복작전 바람에 잠재적 빨치산들은 차고 넘쳤다. 당초에는 세르비아계가 주축이었지만, 고향에서 쫓겨난 유태계, 크로아티아계나 무슬림계들이 빨치산들에게 모여들었다. 그런 면에서 대장정은 인민해방전선의 실질적 모태가 됐다.

그래서 목적지 비하치에 도착한 것이 42년 11월. 일단 한숨 돌리고 난 다음, 티토는 '뭔가 정부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전국 각지에서 지역대표들을 소집해서 11월 26-27일, 유고슬라비아 반파시스트 인민해방위원회Antifašistički veće/vijeće narodnog oslobođenja Jugoslavije (AVNOJ)를 구성했다. 혁명은 일단 잊고 침략자에 맞서 싸우자는 결사체다. 이에는 이전 농민당, 세르비아계 민주당, 무슬림 조직등의 대표가 54명이 모였다. 정부까지는 아니지만 해방운동 세력의 대표기구가 됐다. 티토 그 자신은 이 자리를 빌어서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군 최고 사령관이 됐다.  이 때가 빨치산들에게는 속칭 '비하치 공화국' 체제다.

비하치에서 열린 1차 AVNOJ회의. 상단에 쓰여있는 글씨는 '파시즘에 죽음을, 인민에게 자유를'smrt fašizmu-sloboda narodu, AVNOJ의 공식 구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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