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6일 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6 : 독립 아니면 부활

오토만 터키가 서구문명권에 이리 저리 밀리기 시작하면서 세르비아에도 독립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 18세기 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나폴레옹에게 조리돌림 고전하는 사이에 오토만 터키의 술탄 셀림Selim III세가 어떻게든 살아볼 요령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세르비아를 비롯한 변방에는 상당한 자유를 부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몸은 김정구 마음은 김완선이랬던가, 내부적 부패가 극에 달한 오토만 체제 자체가 통제가 안됐다.

가장 큰 문제는 기득권 세력. 오토만 확장의 일등공신 예니체리들이 공고한 기득권을 형성하면서 술탄에게 반기를 들어 1802년에는 술탄의 총독을 살해하고 세르비아를 점거하고, 폭압을 일삼았다. 1804년 이들은 세르비아 내부적으로 싹트는 반란의 조짐을 선제적으로 제압할 요량으로 세르비아계 주요 지도자들 150명을 한곳에서 살해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곳곳에서 반란의 물길을 트는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세르비아 1차 봉기다.

이 때 세르비아인들이 봉기의 지도자로 지명한 사람이 조르제 페트로비치Đorđe Petrović, a.k.a 카라조르제Karađorđe, 영어로 표현하면 Black George다. 일자무식에 양돈업자였던 이 사람이 어떻게 민족의 지도자까지 올라설 수 있었는가. 세르비아는 이미 귀족들이 사라져버린 평등사회였다.  전국민이 거의 무학인 상황에서, 무식은 지도자로서의 결격사유가 아니었다. 카라조르제는 이미 터키와 맞서 싸우다 대가족을 이끌고 탈출을 감행했던 적도 있고, 오스트리아 군 통제하에서 군인생활 경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잔인, 과단, 용맹한 행동은 세르비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평균적으로 키가 큰 세르비아인들 중에서도 카라조르제는 더 컸다고 한다.

카라조르제는 자신을 찾아온 세르비아 가부장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나는 너무 잔인하다. 당신들이 아마 못견딜 껄?'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거듭된 요청에 그는 못이기는 척 수락하고, 이처럼 비싸게 군 덕에 3만 세르비아 반란군의 총수로서 절대적인 리더쉽을 확립할 수 있었다. 오토만 내부에서도 손발이 맞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일련의 전투를 거쳐 반란 예니체리들을 물리치고 세르비아를 해방시켰다.



성사바 교회 앞의 카라조르제 동상. 사뭇 위협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전설을 통해서 전해지는 카라조르제의 아우라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양반, 자기가 했던 말 처럼 정말로 사나왔다. 청년시절 오스트리아로 도망을 거부하는 양아버지를 직접 죽이고, 동생이 양가집 규수를 강간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처형, 시체를 며칠 동안 그 자리에 걸어놨다고 한다. 그렇지만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는 민족해방의 첫 물꼬를 튼 지도자로서 추앙받는다. 야만인으로서의 야성과 지도자로서의 매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었던 듯.....


세르비아는 이렇게 하나의 해방구가 되면서 독립의 발길을 디디기 시작한다. 귀족-농노 구분이 없는 세르비아와 같은 상황에서 카라조르제는 처음으로 대의체제를 만들었다. 그 스스로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지만, 학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그는 세르비아인들을 위한 교육기관도 만들었다. 이런 체제가 1813년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유럽의 정세가 급변하면서 카라조르제의 해방구도 위기를 맞았다. 1812년은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처들어간 해이다. 러시아가 궁해진 입장에서 오토만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오토만이 군사력을 돌려막기가 훨씬 수월해 졌다. 처음에는 카라조르제가 골치거리 예니체리 잔당들을 처리해줘서 고마왔지만, 자신의 권위에 복속할 의도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게된 오토만이 1813년 대군을 이끌고 발칸으로 들어섰다. 까마득한 대군을 맞아 카라조르제를 비롯한 반란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로 망명도생의 길로 들어서고, 1차 봉기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1차 봉기는 결국 실패했지만, 세르비아의 궐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차봉기가 진압된지 2년 후인 1815년 2차 봉기가 일어났다. 이번에 봉기를 주도한 사람은 밀로쉬 오브레노비치Miloš Obrenović. 출생과정이나 사회적 배경이 카라조르제와는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 양반의 봉기는 카라조르제 때와 달리 궁극적으로 성공했는데, 그 실마리는 아이러니스럽게도 다시 한번 나폴레옹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지면서 오토만 터키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향배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브레노비치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오토만과의 협상에 나선 것이다. 결국 오토만이 세르비아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되, 세르비아는 자치권을 확보하는 구도가 만들어 졌다. 그 상황에서 그는 세르비아 대공Prince가 됐다.

2차봉기를 주도하는 오브레노비치. 터키식 복색이 눈에 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금 한다하는 집안들은 다들 이러고 살았다. 카라조르제가 비타협적인 군인의 이미지라면 오브레노비치는 외교가 또는 비즈니스맨의 면모가 강하다. 터키와의 타협을 추구하는 동시에 열강들과도 줄다리기를 벌이면서 세르비아의 독립을 점진적으로 완성해 나갔다.

그러나 이처럼 욱일승천하는 오브레노비치에 가장 강력한 정적이 있었으니, 오스트리아로 망명가 있던 카라조르제였다. 결국 오브레노비치는 1817년 뜬금없이 세르비아로 돌아온 카라조르제를 암살하고, 그 수급을 터키로 보냈다.

오브레노비치가 그 이후 터키로부터 종주권suzerainty을 획득하고, 헌법을 제정한 데 이어, 터키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독립을 쟁취해 나갔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약삭빠른 밀로쉬보다 단심의 카라조르제 쪽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듯 하다. 어쨌거나 카라조르제는 불운한 암살을 당했지만, 후손들은 카라조르제비치Karađorđević 가문이 되어 세르비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언제든 오브레노비치 가문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세력으로서 자리잡았다.

카라조르제가 시작해서 오브레노비치가 완성한 세르비아의 독립은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서구 열강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 회의는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러시아가 너무 막나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모인 열강들의 짜고치는 고스톱 도박장이다. 이를 통해 세르비아는 독립을 인정받았지만, 오스트리아가 끼어들어 보스니아를 가져간 데 대해서만큼은 적대적이었다. 보스니아에 사는 세르비아 동포들 때문이었다. '단결 만이 세르비아를 구한다'는 구호가 머리 속에 선명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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