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9일 일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7 : 왕조의 드라마

세르비아에 왕조 또는 왕조라 할만한 가문이 다시 들어선 것은 400년만의 일이다. 세르비아 민족의 정치적 구심점이 생긴 것은 좋은 일인데, 문제는 이것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점이었으니, 오브레노비치와 카라조르제비치 왕가가 그것이다. 터키와의 외교를 통해 독립의 기틀을 만들어 놓은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국내로 돌아온 카라조르제를 암살함으로써, 유력한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했지만, 가문 마저 밀어버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밀로쉬는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는 카라조르제 미망인과 자녀들을 세르비아로 불러들이고 연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왕조가 만들어졌던, 지역을 둘러싼 열강들의 견제와 줄다리기, 거기에 별다른 통치술을 익히지 못한 신생왕국의 내부적 불균형. 이 두가지가 모여서 웬간한 드라마보다 더욱 극적인 왕조의 역사가 만들어 졌다.

세르비아 1차 봉기를 이끌었던 카라조르제는 반란지도자들에 의해 수령Vožd으로 추대됐다. 2차봉기 지도자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오토만과의 타협을 통해 자치권을 인정받는 수준에서 출발해서 차근 차근 제도를 유럽식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초기만 해도 오토만의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는 공Knez(Prince)로 세르비아에 군림했다. 오토만의 속령이었지만, 지위는 전제군주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 스스로가 오토만 전제군주의 틀을 크게 벗어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그 밑에서 다단한 봉기가 일어났고, 1939년 결국 장남 밀란Milan에게 양위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버렸다. 그 다음부터의 역사를 시시콜콜하게 기록하는 것은 필력도 뒷받침되지 않고, 같은 이름이 계속 재활용되는 바람에 엄청 헷갈리기도 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839 : 밀로쉬의 장남 밀란 즉위. 병약해서 몇주 안에 병사하고, 16살 미성년자인 동생 미하일로Mihailo가 승계했다. 그러나 경험 미숙으로 3년만에 오스트리아로 망명, 아버지인 밀로쉬와 합류한다.

1842 : 반란세력이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장손 알렉산다르Aleksandar를 군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양반, 아버지 같은 카리스마가 없었다. 1858년 결국 의회가 퇴위를 요구했고, 이를 군말없이 수락했다.

1858 : 창업자인 밀로쉬가 78의 나이로 군주로 복귀했다. 망명 당시 '나는 세르비아의 왕으로 죽을 것'이라고 했다는 데 정말 그 말대로 됐다. 20개월 만에 병사한다.

1860 : 창업자의 아들 미하일로가 다시 군주의 자리를 계승했는데, 이번에는 좀 잘했다. 내정개혁을 단행하고 무엇보다 세르비아에 주둔해있던 오토만군을 조용한 외교술로 철수시켜,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또다른 초석을 다졌다. 나름대로 비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1868년 묘연한 이유로 암살 당했다. 지금도 범인과 배후가 누군지 모른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본정통에 서 있는 군주 미하일로Knez Mihailo의 동상.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화려한 쇼핑골목이자 만남의 장소다.

1868 : 미하일로가 후사가 없었던 탓에 5촌조카 격인 밀란Milan이 군주 자리를 계승했다. 레베카 웨스트Rebecca West는 이 양반을 재난 급으로 묘사한다. 전쟁에서 약했고, 외교에서 밀렸으며, 가정사가 어지러웠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멸시당한 군주라고나 할까. 이 양반의 치세에 세르비아가 독립을 인정받고, 또 나라의 격을 공국에서 왕국으로 높였지만, 민심이 이반했다. 결국 1889년 미성년자인 왕자를 놔두고 자진 퇴위했다.

1893 : 그 아들 알렉산다르Aleksandar가 16살 성년이라고 우기면서, 왕으로 등극했다. 결손 가정에서 자라나서 그런지 성격적으로 불안했다. 자진퇴위한 아버지 밀란을 다시 불러와서 총사령관에 앉히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모습도 연출했다. 그러나, 이런 배경에서 자라난 철모른 아들들이 다 그렇듯, 순정이 충만해서, 모후의 시녀이자 이미 한번 결혼경험이 있는 드라가 마신Draga Mašin과의 결혼을 발표했다. 부모는 물론 전 세르비아가 패닉 상태로 돌입. 더 나아가 외척인 두 오빠들이 나설 기세를 보이자 세르비아 군이 나서서, 1903년 왕과 왕비를 왕궁에서 잔인하게 살해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세르비아군은 후계자를 오브레노비치 왕가에서 찾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또다른 가문인 카라조르제비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퇴진한 알렉산다르의 아들, 스위스에서 낭인생활을 하던 페타르Petar를 찾아내서 왕좌에 앉혔다. 그의 나이 58세 때의 일이다.

1903 : 페타르는 프랑스에서 사관학교와 외인부대 장교를 거치고, 보스니아 봉기에 참여하는 등 군인으로써 자질을 보여준 바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세르비아어로 번역하는 등 계몽군주로서의 자질도 가지고 있었다. 두차례에 걸친 발칸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하고, 의회를 활성화하는 등 민주주의도 확장해서 국민적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914년 건강 상의 문제로 왕태자에게 실권을 넘겼지만 곧이어 터진 1차대전을 맞아 노구를 이끌고 군과 함께 했다. 1차대전의 승리를 맞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왕이 되어, 봉기 이후 세르비아의 황금기를 열고 1921년 죽었다.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시대를 본격 개장한 페타르 1세. 낭인 청년기를 보내고, 1차대전을 비롯한 각종 전쟁 등으로 죽을 고생을 했지만, 왕조 중에서 가장 행복한 왕이 아니었을까 싶다.

1921 : 그 다음 왕이 된 알렉산다르는 부왕 페타르 1세의 차남이다. 장남 조르제Đorđe가 있었지만, 증조 할아버지를 닮아서였는지 성격이 너무 과격했다. 1909년 하인을  발로 차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왕세자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알렉산다르는 일찍 권력을 이양받아 섭정왕자로서 1차대전 내내 군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테살로니키 전선을 돌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자질이나 행동거지 면에서 왕으로서의 자질은 분명했지만, 문제는 세르비아가 너무 급속하게 팽창하면서 내외의 정치적 위기에 휩쓸렸다는 것. 지금까지 역사를 같이 해본 적이 없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같이 다스린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1929년 크로아티아의 정치인 라디치가 세르비아 국회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태는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헌법을 정지시키고 독재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1934년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마케도니아와 크로아티아 테러조직에 암살당했다.

1934 : 왕위는 알렉산다르의 아들 페타르Petar II에게 넘어가야 했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알렉산다르의 사촌인 파블레Pavle가 섭정이 되어 페타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세르비아를 다스리게 된다. 이 때는 유럽이 파시즘 등으로 흉흉해지던 때. 옥스포드 출신의 파블레는 심정적으로는 영국에 가까웠지만, 영국과의 인연을 계속하기에는 히틀러 독일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리 빼고 저리 빼다가 1941년 독-이-일 간의 3국 군사동맹에 유고슬라비아가 조인했던게 화근이 됐다. 독일을 전통적인 원수로 간주하던 세르비아 군부가 다시금 쿠데타를 일으키고 파블레를 축출하고 17살의 페타르를 왕에 앉혔다.

1941 : 페타르가 왕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독일이 팔짱을 끼고 있지 않았다. 베오그라드 공습 및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돌입했다. 1차대전 때는 어떻게 든 알바니아 산길을 타고 그리스까지 후퇴할 여유도 있었지만, 전격전을 내세운 독일한테는 이런 전술도 쓸 틈이 없었다. 결국 군은 백기투항하고, 페타르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운다. 빨치산이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하면서 이들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카라조르제, 오브레노비치 두 왕가는 밀로쉬 1명, 미하일로 1명, 밀란 2명, 알렉산다르 3명, 페타르 2명의 왕(또는 공)을 배출했다. 자꾸 썼던 이름을 재활용하다보니, 표로 만들어 보지 않으면 헷갈리기 딱 좋은 가계도라고 하겠다.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하면서, 카라조르제비치 왕가는 왕위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건재하다. 페타르 2세가 1970년에 죽고, 그 아들 알렉산더가 즉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세자로 아직도 남아있다. 왕가는 주로 영국에서 생활하다가, 밀로셰비치 정권이 무너진 2000년에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왕가의 목표는 입헌군주제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1/3가량은 입헌군주제 찬성, 1/3 가량은 아직도 반대다. 왕세자 알렉산다르가 세르비아어를 못한다는 사실이 세르비아 국민을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오늘날 모습. 왼쪽부터 후계자 피터, 왕세자 알렉산더 2세, 왕세자비 캐서린, 차남 쌍동이 필립과 알렉산더 3세다. 로얄 패밀리 홈페이지가 영어로 되어 있다보니, 이름들이 다 영어식이다. 

어쨌거나 세르비아의 왕조는 대하드라마로 전혀 손색이 없는 부침을 겪었다. 누군가 실력있는 제작자가 만든다면,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뿌리Roots나 다이나스티Dynasty 못지 않은 재밌는 대하드라마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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