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8일 수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5 : 산중에 들기시작한 볕

1782년, 블라디카 사바가 죽었다. 40년이 넘도록 권력없는 권좌에 앉아있었던 그가 죽자, 새 세대가 들어설 자리가 생겼다. 약간의 뜸을 들인후 새로운 블라디카로 추대된 것은 역시 페트로비치 가문의 청년 사제 페타르Petar였다. 이전 블라디카 중에서 페타르라는 이름을 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페타르 1세Petar I가 됐다.

딱히 물려받았달 것도 없는 초라한 권력이었지만, 페타르에게는 선대 다닐로 못지 않은 카리스마가 있었다. 또 하나가 있다면 그의 교육. 산중에서 고리타분한 교육을 받았던 선대 블라디카와 달리 페타르는 몬테네그로 산골에는 비할 수 없는 대처 러시아에서 사제수업을 받았다. 사바와 공동으로 블라디카 직을 수행하다가 러시아에서 죽은 바실리예를 시봉하던 것도 바로 이 페타르였다. 때문에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수 있는 안목도 갖추고 있었다.

페타르 1세의 모습. 동시대의 사람이 직접 그린 초상화다. 엄숙 경건한 성직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앞의 블라디카들의 초상화와 좀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은가? 머리 부분의 후광을 주목한 사람이 있다면 눈썰미가 날카롭다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 페타르 1세는 사후에 성자로 추존되었다.  몬테네그로에서는 성 페타르다. 

페타르1세의 핵심주적은 역시 오토만.... 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몬테네그로에 바로 접한 스쿠타리 파샬릭Pashalik of Scutari의 총독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Kara Mahmud Bushati였다. 이야기가 약간 복잡해 지기 시작한다. 앞에서 퉁쳐서 오토만이라고 총칭했지만, 오토만은 하나의 일괴암적인 성격의 집단이 아니었다. 워낙 구성민족들도 다양했던 것도 있고,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제도와 전통이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지방 수령들이 나중에는 지겹게 술탄의 말을 안들었다. 몬테네그로인들이 원쑤 오토만이라고 여긴 족속에는 동일한 슬라브 혈통의 무슬림들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은 알바니아계였다. 카라 마흐무드 역시 알바니아계였던 것이다.

페타르 1세와 지역의 자웅을 다투던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 원초적으로 마초적인 모습이다. 카라라는 말은 터키어로 '검은색'을 의미한다. 거무튀튀한 얼굴색의 장사(속칭 소도둑 인상)들에게는 '카라'라는 별칭이 붙었던 것 같다. 또다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르비아의 창업자 '카라' 조르제다. 

알바니아. 슬라브 족이 아니다. 언어 계통도 다르다. 슬라브족이 도래하기 전에 원래 발칸반도에 정주하고 있던 일리리아 원주민들이 바로 이들이라는 설이 있다. 슬라브족에 이리 밀리고 저리 퉁겨 나가면서 디나릭 산중에 처박히게 됐다. 오토만이 발칸 반도로 들어오면서 다수의 카톨릭 또는 정교계통의 알바니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 결과 오늘날은 무슬림들이 다수를 이루는 나라가 됐다. 오토만 고유의 아동납치+영재교육 시스템Devşirme에 알바니아인 다수가 발탁된 결과, 오토만의 명재상이나 엘리트 중에서 알바니아인들이 많이 나왔다.

알바니아는 발칸의 민족문제에 또다른 각도의 스핀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

카라 마흐무드는 오토만의 충성스런 신하가 아니었다. 왜냐면 이 사람이 술탄의 말을 무던히 안들었거든. 빡친 술탄이 이 사람을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지만, 오히려 간단하게 격퇴당하고 만다. 이러니 오스트리아나 러시아가 오히려 마흐무드에게 반오토만 공동전선을 짜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오토만 내부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페타르1세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지배욕이 강한 마흐무드가 골목대장 노릇을 확실히 하려고 했거든. 즉위 초 한때는 체티녜가 이 양반에게 점령된 적도 있었다. 1796년 7월 이 마흐무드가 지역의 골치꺼리 산중 부족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오토만군은 쨉도 안될 것 같은 페타르 휘하 몬테네그로 부족 연합군에게 일격을 당하고 만다. 마흐무드 본인은 부상까지 당하고....

몬테네그로인들의 전투모습. 이 동네의 쟁투에서는 자비란 있을 수 없었다. 양측 할 것 없이 목을 따는 것은 기본. 적의 목은 개인적 용맹과 전과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몬테네그로에서는 도주나 퇴각시 머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부상당한 전우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는 것이 예의였다고 한다. 

절치부심에 와신상담을 거듭한 한 마흐무드가 같은 해 9월 다시한번 군사를 일으킨다. 오늘날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 근처인 크루시Krusi에서의 혈투. 오토만 3만 대 몬테네그로 7천. 그러나 얼마전 패배의 충격 때문에 판단이 흐려진 것일까. 마치 뭐라도 씌인 것처럼 마흐무드는 또다시 지고 만다. 진것 뿐만 아니라 마흐무드 자신은 생포/참수당해서 그 목이 체티녜 거리에 걸리고 말았다.

몬테네그로로서는 강적을 만나, 이긴 것도 좋았지만, 가장 큰 소득은 이를 계기로 이전까지 블라디카의 말빨이 안먹히던 브르다Brda의 일곱 부족을 영향권 안에 거두게 됐다는 것이다. 거기에 국제적으로는 용맹한 전사로서의 명망을 얻었다. 영국 등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이 몬테네그로를 주목하게 된 계기다.

1796년의 전투로 넓어진 땅. 올드 몬테네그로라고 표시한 영역이 페타르가 물려받은 영토(?)다.  크루시 전투를 계기로 브르다 지역이 새롭게 몬테네그로 수중에 들어왔다. 오늘날의 몬테네그로에 비해서도 형편없이 좁은 땅이지만 이게 어딘가. 

더 나아가 페타르 1세는 중앙정부(?)의 사법적 기능을 강화하고 법을 도입했다. 물론 이 이후에도 부족장들을 다잡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꿈같은 일이었다. 로브첸 산중에 볕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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