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5일 수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13 : 무너진 왕조

두차례에 걸친 발칸 전쟁에서 몬테네그로는 기대한 것 만큼 재미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손해를 본 것은 아니다. 문제는 민족 주도권이다. 이것 만큼은 전쟁을 통해 부쩍 커버린 세르비아에 빼앗긴 꼴이다. 니콜라 입장에서는 세르비아와의 통일을 주장하는 몬테네그로인들이 많아지면서 더 입장이 불편하게 됐다.

1914년 보스니아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당하면서 역사의 보폭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니콜라는 이런 때 차라리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중립을 지키면 뭐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미 주변에는 범 세르비아 통일론자들이 들어선 상황. 어쩔 수 없이 세르비아의 편에 섰다. 각료들이 참모총장을 세르비아에서 모셔왔다. 당연히 주요 보직들 역시 세르비아 장교들의 차지. 몬테네그로인들에게는 거의 정신적 지주인 러시아가 이 조치를 지지하고 나서 니콜라는 대놓고 반대를 할 수도 없었다.

1차대전 당시 러시아에서 발행됐다는 엽서. 동맹국의 국가수반들을 나열했다. 중간에 깃털달린 모자를 쓴 양반이 세르비아의 왕 페타르, 바로 그 우측이 장인, 몬테네그로 국왕 니콜라다.  장인과 사위 사이의 나이차이는 딱 세살이었다. 이 중 1차 대전 후 승전국이면서도 나라가 없어진 것은 몬테네그로 밖에 없다.  

처음에는 세르비아가 곧 잘 싸워서 어찌어찌 버텼지만, 1915년 10월 불가리아가 독일-오스트리아 편에 서면서 전황이 크게 바뀌었다. 3면 공격에 직면한 세르비아는 포위섬멸을 피하기 위해서 코소보를 거쳐 알바니아로 들어가는 대장정에 들어갔다. 그것을 니콜라는 못했다. 어차피 몬테네그로군이 스쿠타리도 점령하고 있던 차,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콜라는 세르비아의 수상 파시치Pasić가 영 걸렸다. 범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한 파시치는 나이, 경력, 성격 어느 면에서나 니콜라에 꿀리는 게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이 달마시아/보스니아 방면에서 몬테네그로를 옥죄어 오자 니콜라는 일단 국외로 떠났다. 왕이 사라지자 몬테네그로군을 이끌었던 세르비아 장군들은 간단하게 몬테네그로를 포기하고 국왕이 있는 코르푸로 갔다. 무주공산이 된 몬테네그로. 프랑스에 망명정부를 세우기는 했으나, 팔십 노인 니콜라의 체력이나 사고력이 예전같지 않았다. 아들들이라도 좀 잘났다면 모를까. 셋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미덥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런 공백상태에서 1차대전이 끝났다는 것. 연합군의 틈 사이에 세르비아군이 잽싸게 몬테네그로로 진주해서 의회를 구성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세르비아 주도의 게리맨더링을 파쇄할 구심점이 없었다. 1918년 실시된 포드고리차에서 구성된 의회의 안건은 몬-세 통일, 자동적으로 페트로비치 왕조 퇴치의 건이었다. 결국 이긴 쪽은 통일파.

1918년 포드고리차 의회. 국왕이 아직 본국을 돌아오지 못한 상황에서 세르비아가 무리해가면서 구성했다. 법적이나 절차상 문제가 많았다. 통일파와 반대파 간의 갑론을박이 진행되는 가운데도, 사진을 찍을 여유는 있었다.

물론 아무리 스스로를 세르비아 민족이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이 통일안을 몬테네그로 전체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통일찬성파Bijelaši(백색당)에 반대해서, 반대파Zelenaši(녹색당)이 1919년 크리스마스 때 봉기를 일으키고, 몬테네그로는 내전상태로 들어갔다. 만약 100년 전이었다면, 오토만 터키에 맞서 싸우는 몬테네그로를 기특해하는 열강이 많았겠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전후 처리 회담이 열린 베르사이유에서도 니콜라의 목소리는 파시치의 노회한 외교술에 묻혀 들리지를 안았다. 몬테네그로의 편을 들어주는 강대국은 사위가 왕으로 있는 이태리 정도? 이것도 세르비아가 달마시아 일부를 할양하자, 몬테네그로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되는 일이 없는 가운데 노왕은 결국 1921년 프랑스에서 눈을 감는다. 79살 때 일이다.

몬테네그로가 2006년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부터  독립하고 난 뒤 얼마 안되, 포드고리차에는 니콜라의 동상이 들어섰다. 에디스 더햄은 니콜라를 두고 '발칸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체화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몬테네그로의 영욕을 한꺼번에 경험한 인물이다.

결국 세르비아에 흡수통일된 몬테네그로. 겉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불만은 있었던 것 같다. 1920년 확대된 왕국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몬테네그로에서는 뜬금없이 공산당이 38% 득표율을 올렸다(물론 얼마 안가서 불법화). 공업시설이고 뭐고 개발도 안된 데서...안팔리는 떡, 헐값에 파느니 우리집 개나 준다는 심정이었을까? '나는 세르비아인이기 이전에 몬테네그로인이기 때문에 세르비아인', '몬테네그로인은 최선의 세르비아인(Best of all Serbs)'  몬테네그로인들 사이에 회자된 말들이다. 그저 그런 세르비아인임을 인정하기에는 뭔가 억울하다 싶은 몬테네그로인들의 심정이 보이는 것 같다. 몬테네그로 특유의 전투적 세르비아 민족주의와는 별개로 지하 심층을 떠돌다 2000년 경에 간헐천처럼 치솟아 올랐다.

어쨌거나 15세기부터 투쟁과 쟁투로 국가를 만들어나갔던 몬테네그로.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적 틀 안에 들어가서 상대적으로 오랜 평화기를 맞았다. 태평성대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중앙정부는 여전히 무능했다. 몬테네그로 마초들의 관심은 전투가 아니라 새로운 문명적 놀이로 이어졌으니, 그게 바로 운전이다. 자동차 운전. 2차대전 직전에 몬테네그로를 방문했던 레베카 웨스트는 몬테네그로 남성들이 통행이 어려운 산악지대를 자동차로 돌아다니다가 전복, 추락 등 교통사고로 얻은 상처를 전투에서 얻은 영광의 상처마냥 자랑스러워 했다고 전한다. 그게 적어도 2차대전 전까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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