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9일 수요일

구유고 음악 14 : 유고 록의 큰형님 Indexi

유고슬라비아 록과 관련해서 80년대 뉴웨이브를 특필하는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것이 유고록의 처음과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런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고, 뉴웨이브는 그런 역사의 한가운데에 화산폭발처럼 나타났을 뿐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록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마치 헤비메탈은 어느 밴드가 시작했을까라는 것 만큼이나 비슷한 바보같은 소리지만, 나름 잡히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바로 보스니아의 록밴드 인덱시Indexi다. 1962년 사라예보에서 결성된 이 밴드는 2001년 해체 때까지 40년 역사를 보유한 유고록의 증인이자, 역사라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바깥 문물인 록을 수용했던 얼리어댑터는 역시나 학생 층이다. 인덱시 역시 학교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기록한 장부라는 뜻이란다. 밴드 인덱시 역시 스스로가 '학출'임을 시사하는 강력한 징표다. 처음에는 단순히 외국 밴드의 곡을 커버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작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인덱시가 주목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의 67년 자작곡 '손을 잡아요'Pružam ruke가 유고 최초의 '오센틱' 록음악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40년 역사 속에 기십명의 멤버들이 들락거렸지만, 46년 개띠 동갑내기 트리오가 가장 오래 머물면서 인덱시 음악의 뼈대를 만들었다. 왼쪽부터 다보린 포포비치Davorin Popović(보컬), 파딜 레지치Fadil Redžić(베이스), 슬로보단 코바체비치Slobodan Kovačević(기타).

처음 연주했던 음악은 비틀즈류의 멜로디록이었는데, 이게 중기에 들어 싸이키델릭/프로그레시브록으로까지 변모해 나갔다. 때문에 인덱시는 유고 프로그레시브의 비조로도 지목된다. 원래 이 밴드의 건반을 맡았던 코르니예 코바치Kornelije Kovač가 독립하면서 베오그라드에서 프로그레시브밴드 코르니 그루파Korni Grupa를 만들고, 또 여기에서 보컬하던 다도 포피치Dado Popić가 자그레브에서 또다른 프로그레시브 그룹 타임Time을 만들었으니 인덱시는 한 집안 족보의 첫페이지에 위치한 셈이다.

또 이들의 음악적 거점 사라예보는 선후배/동료가 서로 당기고 끌어주는 문화가 있었다. 70년대 어느 때 건반에 공백이 생기자 인덱시는 이웃 밴드인 프로 아르테Pro Arte와 키보디스트를 공유(?)하는 희한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사라예보에 만연한 라야(동아리) 문화가 음악계에도 침투한 것이다. 그 덕에, 유고 팝 음악계에는 '사라예보 스쿨'이 형성되고, 보스니아의 3대 수출품 중의 하나가 음반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런 타이트한 음악적 유대 속에서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 같은 유고 최초의 수퍼밴드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덱시는 한마디로 유고 록의 큰형님이다.

어쨌거나 다양한 장르의 시도와 실험에도 불구하고, 인덱시의 음악에는 항상 기억할 수 있는 멜로디가 들어있다. 그런 면에서 인덱시는 철저한 대중음악 밴드였다. 보컬 다보린 포포비치의 미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도 싶은데, 70년대 전성기때의 음악적 '야심'에도 불구하고 멜로디 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1969 년 발표 대표작 '아침이면 모든게 변해있을거예요'Jutro će promijeniti sve. 연주모습을 찍은 것은 80년대 언제 쯤이 아닌가 싶다. 다 좋은 데, Flying V하고 나비 넥타이는 암만 봐도 눈에 걸린다. 이들의 삶이 서구의 Rock'n Roll Life Style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나긴 밴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정식으로 발표한 앨범은 딱 두 장이다. 나름대로는 유고 록음악 시장과도 관련이 있을 터인데, 아무래도 록 팬덤이 굳지 않아서 그런지 이들의 주요 공연무대는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이나 가요제였다. 거기에 곡을 발표해서 입상하는 게 이들의 주요 목표였던 것이다. 음반 역시 싱글이나 EP판이 주된 매체였다. 유고의 전설적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이 그만그만한 팝송을 만들었던 것도 이런 환경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환경이야 어쨌건, 인덱시가 78년에 맘잡고 제작한 음반 '푸른 강물'Modra Rijeka은 이들의 음악적 열정과 욕심이 농축된 유고 프로그레시브의 걸작이다.

80년대에는 멤버들도 나이가 들고, 지금까지의 음악적 성과를 지키자는 수성의 멘탈리티가 강했는지 활동도 뜸해진다. 그러다 90년대 유고 내전이 터지면서 밴드가 산산이 흩어지게 됐다. 그래도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나. 사라예보가 근대 전쟁사상 최장기간의 포위를 겪게 되는 와중에도 보컬 다보린 형님은 끝내 사라예보를 떠나지 않았다. 


72 년에 발표된 '나는 꿈꾼다'Sanjam. 인덱시표 대표 발라드다. 클래식 기타 반주로 시작한 단조곡이 후렴에 들어가서 70년대 대중가요 풍 장조로 변하고, 그것이 다시 원테마로 돌아올 때의 건반 트랜지션이 너무 맘에 든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멤버들이 모여서 1999년 두번째 앨범 '돌꽃'Kameni Cvijet를 발표했다. 물론 전성기를 지나 만든 앨범이라 그런지, 곡들의 퀄리티는 전작에 못미친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겪은 밴드가 풍기는 인간적 아우라는 여전하다. 여담이지만, '돌꽃'은 2차대전때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악명높은 수용소 야세노바츠Jasenovac 터에 조성해 놓은 기념조형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골육상쟁, 형제살륙의 전쟁을 겪고 난 이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음반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가 궁금하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렇게 살아 남았음을 남기고 싶었을까.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깐. 보컬 다보린 형님이 2001년 50대 아쉬운 나이로 죽으면서 밴드도 결국 막을 내린다. 굳이 다른 보컬을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2004년에는 밴드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작곡했던 코바체비치 형님까지 죽었다. 주축 3인방 중에 레지치 형님은 전쟁에 학을 뗐는지 현재 미국 어디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난리통 후 다시 공연에 나선 다보린 형님. 이 때는 록스타라기보다는 마을회관 노래자랑 이장님 아우라다. 주위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여러 애칭과 별칭이 있지만, 나중에는 그냥 '가수'Pjevač로 불렸다. 이 별명에는 영어 정관사 The가 함께 붙어있다고 보면 되겠다.

어쨌거나 밴드는 없어졌지만, 사라예보 시민들은 최악의 상황을 자기들과 함께했던 왕년의 스타를 여전히 잊지 않았다. 보스니아 대중음악계는 최고권위의 대중음악상 이름을 다보린상으로 개칭, 그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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