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6일 일요일

유고 삼국지 2 : 내전의 시작

유고에 진주한 나찌독일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유고의 분할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베르사이유 조약이라면 치를 떨었던 히틀러는 그 조약의 결과물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거니와, 무솔리니 역시 달마시아 등 아드리아 해변지역에 복벽주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디바이드 앤 룰. 지배의 황금율이다. 유고라는 틀 아래서 세르비아와의 동거가 영 불편했던 크로아티아 민심을 이용한다. 이같은 지배자의 필요에 부응해서 아닌 밤 중에 홍두깨처럼 나타난 사람이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

1941년 안테 파벨리치
1889년 오-헝 제국 치하 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난 이 사람. 부모를 따라 보스니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살았다. 초등학교 한 때는 무슬림 학교 Maktab를 다니기도 해서 무슬림 문화와 경전에 익숙했고, 그것이 나중에 우스타샤의 무슬림에 대한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파벨리치가 안착한 귀의처는 순혈적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였다.


 자그레브에서 법학을 전공한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정의당Hrvatska Stranka Prava 열혈당원이 됐다. 하지만 1차대전으로 세르비아 헤게모니의 유고슬라비아가 등장하면서 순수 크로아티아의 꿈은 더욱 강해졌다. 왕국의 당국에 의해 활동이 금지된 것이 1929년. 이 때 파벨리치는 폭력노선을 걷는 우스타샤-크로아티아혁명운동Ustaša – Hrvatski revolucionarni pokret을 조직하고, 초록동색 무솔리니가 있는 이태리로 넘어가 웅거했다. 2차대전으로 파시즘 세력들이 유럽을 접수하면서 파벨리치에게도 햇볓이 들기시작한다. 1941년 독일의 유고 침공과 더불어 그는 급거 귀국, 총통Poglavnik의 자리에 올랐다.

1937년 드라쟈 미하일로비치
한편 크로아티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구 유고왕국군인들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고군이 녹아나면서, 일부 장교들이 조직적인 저항활동에 돌입했다. 그 대표가 드라고륩 '드라쟈' 미하일로비치Dragoljub Draža Mihailović다. 1893년 세르비아 남부에서 태어났으니까 파벨리치보다는 4살 어리다. 조실부모하고 군인이었던 삼춘 슬하에서 자라다가, 그길로 직업군인이 됐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보스니아 북부에 주둔한 2군단 참모장이었다. 허망한 항복 이후 그는 몇몇의 장교들과 더불어 부대를 이탈해서 세르비아의 산악지대인 라브나 고라Ravna Gora 지역에 숨어들었다. 따르던 사람들이 80명 정도였다고 하니까, 시작은 미약했다. 이들을 데리고 평소 지론이었던 체트닉Četnik게릴라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체트닉이란 용어가 보통명사이고, 나찌에 협력했던 체트닉들도 있다보니, 미하일로비치는 스스로의 정치/군사 활동을 '라브나 고라 운동'이라고 명했다. 

라브나 고라 운동이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한 것은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운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눈에 들기 시작한 다음부터다. 왕가는 미하일로비치를 장군 겸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왕가보다 더 기뻐한 것은 영국정부였다. BBC는 1941년 11월 그를 유고슬라브군 사령관으로 지칭했다. 별다른 도움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미하일로비치 휘하 체트닉군의 도덕적, 법적 기반은 크게 높아졌다. 미하일로비치의 목표는 당연히 왕가의 복귀였다.

1928년 티토
이 같은 세력구도 하에서 또다른 풍파를 일으킨 제3세력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omunistička partija Jugoslavije(KPJ)이다. 유고 공산당 당수 요십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는 1892년 크로아티아 북서부에서 크로아티아인 아버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시삭Sisak에 있는 금속공 밑에서 도제 노릇을 하다가 1913년 군대에 징집됐다. 1차대전 오-헝제국군으로 동부전선에서 싸우다가 러시아의 포로가 된 그는 수용소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접하고 공산주의자가 됐다.

전쟁이 끝난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조활동을 조직하다가 당국에 잡혀서 5년 감옥생활을 한 이후, 지하에서 암약하면서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의 밀정 노릇을 했다. 티토Tito는 그를 지칭하는 암호명 중의 하나였다.

법학을 전공한 파벨리치나 사관학교를 졸업한 미하일로비치에 비해 가방끈은 짧다.레닌이나 마오쩌뚱과 같이 이론가를 자처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희한한 균형감각이 있었다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다. 그는 부모 탓에,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 슬로베니아어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노동자 시절 독일, 포로 시절 러시아에서 습득한 어학으로 코민테른 등 국제무대에서도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다.

1937년 티토가 공산당수의 자리에 오를 때만해도 유고 공산당은 계급문제에 민족문제까지 겹쳐 당내 노선투쟁으로 오합지졸의 수준이었다. 가장 커다란 약점은 공산당 수뇌부가 비엔나에서 유(?)하면서 현장과의 유대감이 엷어졌다는 것. 스탈린이 소련공산당은 물론 코민테른까지 숙청하면서, 유고공산당 수뇌들까지 도륙을 내는 바람에, 항상 현장에만 있던 그에게 순서가 돌아왔다. 최악의 순간에 당을 맡았으니, 한마디로 유고공산당은 바닥부터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쨌거나 2차대전을 기해 삼국지 같은 삼파전이 벌어졌다. 유고에서는 2차대전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더해 자체적인 내전이 발발하는 복잡한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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