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일 일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6 : 합스부르크의 팽창

17허망하게 토종 귀족들을 잃어버리게 된 크로아티아의 주변 국제정세의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나타났다. 크로아티아 두가문의 난이 진압된지 10여년이 지난 1683년 오토만의 Grand Vizier인 카라 무스타파Kara Mustafa가 뜬금없이 비엔나를 처들어간 것이다. 20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모아서 비엔나를 겁박하니 합스부르크의 Leopold 황제도 일단 도망가기 바빴다.

1683년 비엔나 포위전 : 이 때보다는 훨씬 뒷 시대에 태어났지만, 모짜르트의 초시대적 히트곡 중에 터키 행진곡이 있다. 모짜르트 시대 오스트리아는 오토만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군악대를 조직해서 전쟁터로 끌고 다녔던 것은 오토만 터키가 처음이라고 한다.
* 자료원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Vienna_Battle_1683.jpg

하지만 거기까지. 

1만명 남짓으로 지키는 비엔나에서 발이 묶이고, 여기에 폴란드, 바바리아 등 독일의 각 왕국에서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급격하게 역전됐다. 오토만군의 일방적인 패주가 시작되고, 평지에 풍파를 일으켰던 카라 무스타파는 결국 베오그라드에서 참수당했다. 이 때의 패전을 계기로 오토만군 뿐만 아니라 오토만 제국 자체가 이 시점을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았고, 이 이후로 유럽의 병신 병자Sick Man of Europe로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이후 30년 간에 걸쳐 헝가리를 비롯하여 크로아티아 땅 대부분이 회복되고, 1697년에는 사보이의 오이겐공 Prince of Savoy Eugen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과의 젠타Zenta 전투에서 패퇴하면서 이제는 오토만이 평화를 구걸하는 신세가 됐다. 

1699년 체결된 스렘스키 칼로브치Sremski Karlovci 협정을 통해 오토만 제국은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영토를 포기하게 되는 바, 오이겐 공은 부다페스트 부다왕궁에 동상을 모실 정도로 초국적 영웅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오이겐공의 초상, 원래는 프랑스 왕궁에서 총신의 자제로 자라났으니 프랑스 사람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형제 중에 가장 병약했지만 군문에 들어가기로 결심하면서, 자기를 받아준 오스트리아 황제를 위해 진력했다. 비엔나에는 이 사람의 여름별장이던 Belvedere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러한 국제적 정세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활약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국토의 상당부분이 오스트리아 황제의 직할지로 남게된데다가, 크로아티아인들을 이끌만한 대표적 가문도 없어진 상황에서 자신을 내세울 만한 계기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중앙집권적 행태는 더욱 강해졌고, 거기에 더해서 과거 크로아티아를 지배했던 헝가리 귀족들까지 나서서 크로아티아를 헝가리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중 왕국 체제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자치를 인정하던 과거 헝가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18세기초 유럽의 세력판도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가 전세기에 비해 부쩍 커졌다.

베니스의 직할로 다스려진 해변지역 역시 역시 상황은 안좋았는데, 베니스 공화국은 광대한 해상 영토를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내재적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 보다는 공산품(베니스)-원자재(식민지) 분업구조를 유지하면서 지역경기를 빈곤으로 내몰았다. 베니스는 정책적으로 식민지에서 학자보다는 군인을 원했고, 군인을 만들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가난의 대중화였기 때문이다. 한 예로 크로아티아에서 생산한 소금에 중과세를 부과하면서, 생선의 보관을 위해서 소금이 필요했던 달마시아 어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과거에는 숲이 울창했던 크로아티아 해안지방이 지금은 팍팍한 돌산 밖에 남지 않은 것이 베니스가 배를 만들 나무를 크로아티아 해안에서 조달하면서 남벌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뭐 하나 시원한 소식이 없는 가운데도 크로아티아인들의 가슴이 끌어오르는 분위기는 자꾸 조성됐는데, 유럽에서도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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