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6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8 : 빛나는 예외, 두브로브닉

초기에 잠시 반짝하던 때를 제외하고 적어도 19세기까지 크로아티아의 역사에서 해뜰 날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한 민족의 쟁투를 놓고 봤을 때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생존자로서 역사의 투쟁에서 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모든 구석이 고투 속에서 역사를 보낸 것은 아니었으니, 그 예가 바로 라구사Ragusa 공화국이다. 오늘날 두브로브닉Dubrovnik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도시 국가는 크로아티아가 악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베니스, 제노아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두브로브닉 올드타운의 전경, 우리나라에서 고현정씨가 커피믹스 광고를 찍어면서 유명해졌다.

이태리 쪽에 비해서 훨씬 더 투명하고 맑은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변에 위치한 이 중세도시는 오토만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에도 지중해 무역의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 

베니스, 헝가리, 오토만 등 주변 열강들의 움직임에 따라 속국을 자처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 어떠한 경우에도 외세의 실질적 지배를 허용했던 적이 없었다. 몽매한 군주가 나오면 한큐에 역사에서 사라지기 십상이던 문명의 경계선에서, 라구사 공화국이  14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독자적인 공화정 정치체제를 유지해왔다는 사실 자체는 경이롭다할 수 있을 것이다.(사가들은 도시 자체는 한 7세기 정도부터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외교기술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외적들의 위협을 돈으로 무마할 수 있을 만큼 재력도 튼튼한데다 사진에서 보듯이 성곽도 튼튼해서 쉽게 공략할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베니스가 오토만과의 쟁패로 점점 내리막을 걷고 있을 때도, 이들은 오토만, 헝가리, 베니스 등과의 긴밀한 외교관계를 통해 자신의 상권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이 잘 나가던 공화국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으니, 17세기 중엽 지진으로 인해 통령관저 등 대다수의 주요건물들이 무너지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오늘 날 올드 타운의 모습은 그 이후 복구된 모습인데, 안타깝게도 왕년의 영화를 제대로 재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둘째, 주요 교역대상인 중국, 오토만 문명이 16세기를 넘어가면서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신대륙, 신항로가 여기저기서 발견된 상황에서 지중해 무역은 과거 프레스티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근대적인 무기체계의 발명으로 인해 높은 성곽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남은 건 외교술인데 주둥이로만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면, 세상에 망할 나라가 없을 것이다. 

두브로브닉 성당이다. 카톨릭 역시 라구사와 크로아티아를 엮어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1806년 나폴레옹의 군대에 성문을 열면서 라구사 공화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그 다음부터 달마시아의 일부로서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다면 이들 라구사 사람들은 스스로를 크로아티아인으로 여기고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인구는 슬라브 계통이 다수였지만, 지배계급은 라틴어나 라틴계 지역방언을 사용했으며, 원로원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지배계층의 이런 생각에도 불구, 라구사 공화국 전성기인 16세기, 지배층의 일원인 이반 군둘리치Ivan Gundulić가 크로아티아어로 장편서사시를 만들었으니, 크로아티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1990년대 유고가 붕괴되면서 내전이 발발하자, 몬테네그로 출신의 민병대가 두브로브닉에 포격을 가하면서 국제사회가 공분한 적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유적에 대포를 쏜다는 것이 너무 야만적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폭격으로 갈아업다시피한 크로아티아의 또다른 도시 부코바르Vukovar와 달리, 두브로브닉에 대한 공격은 조기에 중단되고 말았다. 역시 사람이건 도시건 이쁘고 봐야할 일이다. 

댓글 1개:

  1. 사람이건 도시건 이쁘고 봐야할 일이다.. 재밌는 말이네요 ㅋㅋ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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