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1일 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1 : 1차대전과 남슬라브족의 나라

제국의 교묘하고도 노회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는 이웃의 발칸 민족들과 더불어 점점 더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이 되어 갔다. 1908년 오스트리아가 터키의 청년터키혁명Young Turk Revolution에 자극을 받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탄하자, 그 동안 헝가리 측의 통치에 적극 협력해왔던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이 대거 반정부로 돌아서는 효과가 났다. 정치재판, 회유 어떤 수를 써도 크로아티아 의회에서는 헝가리가 나오는 대로의 선거결과가 나오질 않았고, 결국 1912년에는 의회를 해산하고 라디치 등의 요인들을 잡아들였다.

거기에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등이 1차 발칸전쟁Balkan War을 일으키고, 또다시 오토만 터키군을 패퇴시키자 발칸의 전세는 더욱 험악해졌다. 1913년 전후 영토분배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가 2차 발칸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패하자 세르비아는 영토를 거의 두배까지 늘릴 수 있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발칸을 노리던 오스트리아로서는 복장터질 일이었다. 어떻게든 세르비아를 손을 봐줘야 할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는 가운데.....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다고 1914년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드 대공Arch Duke Ferdinand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칩Gavrilo Pricip에게 암살을 당했다. 오스트리아는 주권국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최후의 통첩을 때리고 전쟁에 돌입했고, 복잡하게 맞물린 국제정세에서 이는 연쇄반응을 거쳐 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사라예보에서의 암살장면 복원도 : 비스마르크의 예언 중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발칸에서 난리가 날것이라는 게 아니라, 그 난리가 '그 어느 빌어먹을 바보짓'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물론 황태자의 암살이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이 사건은 우연에 우연, 오판에 오판, 실수에 실수, 주로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겹쳐서 일어났다. 하지만 결과는 대비극.
자료원: http://www.znanje.org/i/i23/03iv05/03iv0502/html/sarajevski_atentat.htm

이런 국제 정세에서 크로아티아의 처지는 장기판의 말이나 다름없었다. 1915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앙땅뜨 국가Entente Powers들은 런던에서 모여, 슬로베니아, 이스트리아, 북달마시아 양도를 조건으로 이태리를 꼬드겼다. 이태리는 이 미끼를 물고 곧바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혼란기에 제국에 염증을 느낀데다, 앙땅뜨 국가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염려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지사들이 1915년 파리에서 유고슬라브위원회Yugoslav Committee를 결성, 앙땅뜨 국가들에 세르비아와의 연합을 로비하기 시작한다. 

유고슬라브위원회는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도 이들의 노선을 두고 크로아티아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다. 과연 민의를 대표하지 않는 일개 사설조직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 크로아티아로서는 선택지 자체가 많지 않았다. 중립을 지키지 않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편을 선택하는 것 밖에 없었다. 어차피 견마의 노력은 1848년에 이미 했고, 그 결과 돌아온 것은 배신 밖에 없었다. 

1918년 1차 대전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센트럴 국가들이 패전하면서 결국 제국은 붕괴됐다. 100년묵은 여우보다 더 오래 유럽의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합스부르크 황가도 망했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1918년 10월 800년을 이끌어온 헝가리와의 관계를 종식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립을 선언한들 나라를 지킬 힘은 없었다. 1818년 11월 세르비아의 카라조르제비치Karađorđević왕가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를 도합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를 선포한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지도 : 1차대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로 인해 가장 커다란 이득을 얻은 것도 세르비아였다. 불가리아, 헝가리가 당초 센트럴 국가들과 붙어먹는 바람에 이들로부터도 국토를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세르비아의 땅이 엄청 넓어졌다. 사회주의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지도와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었으니, 오늘날 크로아티아 땅인 이스트리아와 해변의 몇몇 도시가 1차대전의 또다른 승전국 이태리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생긴 차이다.
* http://news.bbc.co.uk/2/hi/europe/7251376.stm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반응은 하나의 방향으로 갈피를 잡기 어렵다. 크로아티아 일부에서는 독립을 원했으나, 속아서 왕국에 편입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주어진 정치적 상황에서 독립을 추진할 수단과 토대가 전혀 없었다. 유고슬라브위원회처럼 남슬라브족의 연합을 원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일부 오스트리아 충성파 장교들 처럼 제국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희망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주어진 왕국에서 크로아티아의 자치권을 최대한 얻어내려는 세력이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정치거물이자 민족지도자 격인 라디치는 바로 이 세번째 세력이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줄다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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