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8일 금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9 : 민족? 어느 민족?

18세기부터 징조가 보이더니 유럽에서는 19세기 들어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지난 회차에서 다뤘던 옐라치치, 코슈트, 서로 다투기는 했지만 모두 거대 제국 하에 눌려있던 변방 민족들의 바램을 담아낸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같은 민족주의라고 하더라도 크로아티아에서의 민족주의는 유럽에서 언어와 혈통의 고립점으로 남아있던 헝가리와는 자못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19세기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직접적 타겟은 헝가리였다. 이같은 경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이 있고 난 다음에 더 심해졌다. 그렇다면 헝가리와 맞서는 우리 민족은 무엇인가? 즉, 누구를 아(我)로 놓고 누구를 비아(非我)로 할 것인가의 문제는 크로아티아의 경우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작되기 전에 아와 비아를 가르는 투쟁이 계속됐고, 이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붕괴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됐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오스트리아, 터키, 헝가리 등으로부터의 차이점에 주목한 19세기 초 일리리안 운동Illyrian Movement이 일어났다. 크로아티아 족이 당초 원주민인 일리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정착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아이러니 한 이름이지만, 이 운동의 창시자(류데빗 가이Ljudevit Gaj)는 운동을 통해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의 단합을 생각했다. 언어공동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남슬라브족은 동일민족이다. 게다가 세르비아는 19세기초 오토만 터키에 대한 봉기를 통해 자치(또는 실질적 독립)를 획득했다.

이러한 방향의 움직임은 당시 고개를 들던 범슬라브주의 유행과도 궤를 같이 했지만, 운동 추진체의 실행력이나 현장의 사정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다분한 민족주의 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황가에 대항적인 면모가 거의 없었다는 점도 이 운동의 특이한 단면이다. 한마디로 농촌이나 현장과는 격리된 인텔리들의 공상적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오토만이 퇴조하자 슬슬 불손해지기 시작한 헝가리를 견제하는 차원에서라도 변방의 슬라브 민족주의를 용인하지 않았을까. 서로 의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제국이든 이이제이는 살아있는 준칙이었다. 실제로 제국에서 크로아티아는 헝가리 민족주의를 억누르는 데 앞잡이 역할을 했다. 헝가리가 패퇴하자 그 용도도 없어지고, 슬라브 민족주의 운동도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금지는 됐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앞으로 크로아티아 더 넓게 남슬라브족의 역사에 커다란 저류이자 영향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심의 움직임에 대한 구심의 반작용도 있었다. 주변 남슬라브족과는 별개인 크로아티아 민족의 정체성을 주창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조를 이끌었던 인물(안테 스타르체비치 Ante Starčević)들은 세르비아와의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강조했다. 이런 움직임 역시 또다른 저류로 크로아티아 역사에 도저히 흐르게 된다.

왜 이런 흐름이 생겼던 것인가? 가장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는 19세기 초 세르비아가 오토만 제국에 대한 두차례의 거국적인 봉기를 통해서 실질적 독립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남 슬라브 족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세르비아의 궐기는 앞으로 크로아티아에게 새로운 경계의식을 일으키게 된다.

이 두가지 흐름, 전혀 반대방향의 사조는 크로아티아 역사(더 나아가 이웃의 남슬라브 국가들의 역사)에서 음과 양 같은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사족같은 말이지만 일리리아 운동을 주창했던 류데빗 가이는 부계는 슬로바키아, 모계는 독일계이고, 순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대표주자 스타르체비치는 아빠가 크로아티아 사람이었지만, 엄마가 세르비아 사람이다. 결국 혈통과 삶보다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 셈이니, 이것도 결국은 민족이라는 이름이 내포한 미망의 시작점이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