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3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3 : 엔터 우스타샤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위기에 위기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크로아티아에서는 매우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으니, 우스타샤Ustaša(봉기라는 뜻이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운동을 이끌었던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계 출신으로 세르비아가 헤게모니를 쥔 유고슬라비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골수민족주의자였다. 이들의 대외적 표방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작 크로아티아에서 정치적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이태리에서 무쏠리니의 비호를 받는 과격테러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1934년 알렉산다르 1세 암살 사건 이후에는 이들의 관여가 문제가 되면서 비호라기 보다는 감금 상태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쥐구멍 같은 이들의 처지에도 쨍하고 해뜰날이 있었으니 히틀러와 무쏠리니가 2차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히틀러가 1941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생긴 공백에 크로아티아에 이들을 중심으로 한 괴뢰정권을 앉혔다. 개선장군 처럼 크로아티아로 돌아온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부정하고 독립크로아티아Nezavisna Dražava Hrvatska, NDH 를 세웠다.

무쏠리니와 사열 중인 NDH 수령Poglavnik 안테 파벨리치 : 나찌 코스프레가 완연하다. 히틀러의 외부민족에 대한 증오심을 그대로 계승했고, 그에 걸맞게 행동했다. 로버트 카플란 등 일부 논자들은 나찌즘의 연원을 발칸에서 찾을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청출어람?

졸지에 생각도 않던 독립을 했으니, 1941년 초기만 하더라도 크로아티아인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하지만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는 괴뢰정권이 독립국을 세웠다는 것 자체가 형용모순이었다. 결국 나라를 둘로 나눠서 독일과 이태리의 영향권을 인정했으니, 우스타샤는 독일과 이태리의 군사력이 아니고서는 유지가될 수 없는 정권이었다.

NDH의 판도 : 세르비아는 독일이, 몬테네그로는 이태리가 점령하고 남는 땅인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합쳐서 NDH가 성립했다. 나라를 둘로 가르는 회색선 위쪽은 독일의 영향권sphere of influence, 아래쪽은 이태리의 영향권이 됐으니, 독립국이라는 명칭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게다가 해변가는 이태리에게 양도했으니 달마시아를 둘러싼 이태리의 야심은 그야말로 유구하다.

우스타샤는 독일의 열등민족 박살정책을 계승하여, 영내 유태인과 집시들을 박멸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서구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형성된 발칸의 유태계 사회가 하루아침에 망해버렸다. 여기까지 나찌가 정해놓은 표준화된 이민족 혐오에 더해 우스타샤는 자기만의 색채를 더했는데, 그것은 세르비아계에 대한 박해였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 성호를 그려보라고 해서 카톨릭 성호가 아니면 즉결 처분하는 경우도 있었고, 카톨릭으로 강제개종을 시키거나 혹은 개종을 시켜준다고 해놓고는  한자리에 모인 세르비아계 마을 사람들을 한꺼번에 몰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잔학상은 학살의 원조인 나찌 독일군조차 아연해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우슈비츠 등을 본딴 야세노바츠Jasenovac 수용소를 세워놓고 공장형 학살을 자행했다. 이 악명높은 수용소에서는 많게는 70만, 적게는 2만 정도의 인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은 쪽으로 갈수록 세르비아, 낮은 쪽으로 갈수록 크로아티아 쪽의 주장이다. 미국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약 3년 반 가량의 운영기간 중 야세노바츠에서는 약 77,000-90,000명 가량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는 곡물다발을 자르는 농기구였던 이 도구를 우스타샤들은 세르비안 커터srbosjek라고 명명하고, 사람잡는 도구로 썼다. 다소 작은 외양과는 달리 치명적 도살 도구였는데, 사람의 멱따는데 경동맥을 끊는데 효율적으로 만들어졌다. 야세노바츠 수용소에서는 이것으로 사람잡는 경진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때때로 인간의 잔인함은 그 많은 고어 무비나 잔혹극에서도 아직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 자료원 : Wikipedia, srbosjeck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숫자를 두고 로버트 카플란은 유고슬라비아 만큼 2차대전 역사가 청산이 안된 나라가 없다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던 NDH는 크로아티아 역사에서 더이상 추락하기 어려운 밑바닥인 것은 분명하다.

나중에 나온 이야기로는 우스타샤은 영내 세르비아계의 1/3은 개종시키고, 1/3은 쫓아내고, 1/3은 절멸시킨다는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의 움직임을 깊은 의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자생적 기반이 없던 우스타샤의 운명은 2차대전의 성패와 직결될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의 전선이 크게 위축되면서, 우스타샤 역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이 임박하자, 파벨리치는 로마, 나폴리 등을 거쳐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암살자를 피해 여기저기 도망다니다가 1957년 스페인에서 병으로 죽었다. NDH군은 같은 달 오스트리아쪽으로 도주, 유고슬라비아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영국군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이들을 기차에 태워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되돌려 보냈고, 빨치산은 이들을  현장에서 즉결처형했다. 이렇게 해서 3만 명 정도가 슬로베니아-오스트리아 국경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Bleiburg 학살)

2차대전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찾아온 크로아티아의 독립은 이렇게 처참하고 험악하게 끝났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는 이것으로 종말을 맞이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사회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억압은 됐을지언정,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우스타샤의 일부는 해외로 도망을 나가 미국, 캐나다, 남미 등지에서 웅크리고 살았다. 이 사람들의 후손들이 나중에 크로아티아로 돌아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

댓글 2개:

  1. 지난 여름 크로아티라를 3박4일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좋은 블로그를 발견하게 되네요. 정말 해박한 스토리에 적절한 유머감각까지 ㅋㅋㅋ 정말 좋은 글, 좋은 자료 많이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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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ㄴ 댓글 감사합니다. 인근 다른 나라들도 가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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