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5일 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7 : 귀신들린 해 1848년

18-19세기 유럽은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는 지극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18세기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등장, 유럽 구석구석에서 나타나는 민족적 자각, 산업국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계급적 자각 등이 버무려진 혼돈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유럽지도는 점점 간단해졌지만, 속사정은 더욱 복잡해져 갔다.

드디어 1800년대 유럽지도 : 이전에 나온 지도들에 비해 (통일되지 않은 독일만 빼놓고) 엄청 간단해졌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드리아해를 주름잡던 베니스까지 잡아 먹은 모습이다.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오토만 터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고...

어쨌거나,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이 철저한 반동정치로 회귀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런 압박과 압력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열망이 응축될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산주의의 귀신이 유럽을 활보하고 있다고 전했지만, 분명 유럽을 괴롭힌 귀신은 공산주의 뿐만이 아니었다. 유럽 구석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각종 사상과 주의 주장들이 나타나면서 1848년은 그야말로 귀신이라도 든 것 처럼 전 유럽이 무병을 알았다. 

반동정치에 앞장섰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집약됐는데, 보헤미아, 헝가리, 이태리 등 각 속령에서 반란이 속출하는 가운데 비엔나에서 마저 봉기가 일어나,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합스부르크 황가 역시 또다른 위기를 맞았다. 가장 커다란 도전은 제국에서 최대다수의 피지배민족인 헝가리의 봉기였다. 러요쉬 코슈트Lajos Kosuth를 위시한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이 황가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포했던 것이다.

크로아티아 입장에서도 민족주의의 열기는 어느 때보다 거셌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자신의 민족적 입장을 대변할 만한 인물로 오토만 터키 국경에서 오스트리아 장교로 활약하던 요십 옐라치치 Josip Jelačić(1801-1859) 대령을 반Ban으로 선출한다.

요십 옐라치치 :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사특별구를 주활동 무대로 했던 이 사람은 부하들의 절대적 신망을 받았다. 반이 될 때까지만도 장가를 가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의 입장은 헝가리에 비해 훨씬 요구사항이 온건했는데, 요체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동등하게 3중왕국Triune Kingdom의 일원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합스부르크가 약해질대로 약해졌을 때 헝가리와의 연합도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헝가리는 아예 크로아티아를 자신의 속령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헝가리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과거의 전례로 보아, 크로아티아를 자신과 동등한 민족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알량한 자존심이 헝가리 사람들에게 강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십 옐라치치가 한 일은 합스부르크의 편을 들어 코슈트의 난을 진입하는 것이었다. 황제에게 충성을 다함으로써 인정을 받고, 독립....은 아니라도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것... 황제의 명을 받지도 않고 덜컥 헝가리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하지 않았다. 헝가리에 들어가서 견마의 수고를 했어도,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장기판의 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황가로부터 자존심 상하는 대접을 받은 적이 한둘이 아니었다. 약탈과 강간 등 오토만 터키와의 오랜 마찰을 통해 체득한 여러 못된 습관으로 인해 크로아티아군의 내부군기까지도 말썽이어서 오히려 헝가리 국민의 결속을 굳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황가의 문제를 풀어준 것은 혁명의 열기가 자국에 까지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러시아 황제. 1849년 러시아 군이 개입하면서 헝가리 독립군이 지리멸렬, 러요쉬 코슈트가 터키로 망명하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헝가리에게 1848년의 혁명은 지금도 항복날에는 아예 맥주를 마시지 않는 버릇이 생길 정도로 깊은 트라우마가 됐다. 개와 말의 노고를 다했던 크로아티아는? 역시 개뿔 얻은게 없었다. 혁명의 열기를 타고 모처럼 제목소리를 냈던 의회Sabor는 다시금 권위와 권력을 하나하나 빼앗기기 시작했다. 옐라치치는 이런 현실을 두고 고뇌와 고민을 거듭하다 조로의 길을 걷고, 혁명이 진압된 10년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

헝가리 문제는 당분간 잠잠해졌지만, 오스트리아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1867년 들어 다시금 입장이 궁해진 합스부르크 황가가 결국 헝가리와의 대타협Ausgleich을 통해, 제국을 비엔나를 수도로 한 오스트리아와 부다페스트를 수도로한 헝가리 2개로 분할한다. 황제만 합스부르크가에서 맞되 두개의 분국은 각자의 의회와 각자의 수도를 가진 2중 제국이 된 것이다. 또 이 때를 기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크로아티아는? 당연히 과거의 관례에 따라 헝가리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니, 한마디로 크로아티아가 쏟아부은 견마의 노고는 없었던 일이 됐다. 헝가리가 벌로 받은 것을 크로아티아는 상으로 받았다는 말도 나왔다. 이 이후부터 크로아티아는 교육 등 여러 면에서 강력한 마자르화Magyarization의 압력을 받게 된다.

때문에 옐라치치에 대해서는 후세 사회주의 정권 등으로부터 '나이브하다'느니, '정치적 둔재'라느니 가혹한 평가가 쏟아졌다. 하지만, 모처럼 민족의 총의를 한몸에 모아낸 이 사나이에 대한 크로아티아인들의 애정은 매우 깊다. 특히 그 이후 계속된 마자르화의 압력 속에서 헝가리와 맞서 싸운 이 사람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던 탓도 있을 것이다. 유고에서 독립하고 난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의 중심광장을 이 영웅에게 헌정했다.

반 옐라치치 광장, 동상도 역시 반 옐라치치. 원래 칼을 뻗은 방향이 헝가리 쪽(북쪽)이었는데,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헝가리 정부의 이야기를 듣고 방향을 남쪽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옐라치치와 동일하게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는 러요쉬는 나중에 가서 헝가리내 소수 민족을  달래지 못한 것을 가장 커다란 실패로 꼽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아집이 결국은 사단을 만들었지만, 오스트리아 내의 어느 소수 민족도 전략적 사고를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에 봉헌된 러요쉬 코슈트. 웃긴 이야기지만 부계조상은 슬로바키아계, 모계 조상은 독일계다. 자신은 스스로를 100% 헝가리인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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