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0일 일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0 : 세기말의 발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1848년은 정치적으로 크로아티아에게는 민족적 열망을 표출하는 계기가 됐지만, 그 결과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크로아티아에 대한 헝가리의 입김과 압력은 더 세졌다.

이때 크로아티아를 이끌었던 민족지도자가 바로 스톄판 라디치Stjepan Radić. 민족운동의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농민당Hrvatska Pučka Seljačka Stranka을 결성했다. 농민당... 제대로된 산업화의 과정도 없었고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이던 크로아티아의 처지를 잘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레베카 웨스트는 라디치의 비전과 정책이 크로아티아의 미래를 대변하기에는 불완전하고 부정합적이라고 봤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처럼 문명의 변방에서 허덕이던 사회에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라디치. 크로아티아 쿠나화에도 올라온 위인이다. 200쿠나는 우리 돈으로 약 40,000원 정도

라디치가 활동하던 시기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각축이 가열차게 진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전세계 다수의 민족들이 기왕의 독립조차 빼앗기던 시기에 라디치의 외로운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될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대로 발동걸린 제국주의가 발칸반도 소수민족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주기도 했다. 가장 커다란 계기는 오토만 터키의 패퇴였다. 19세기 초 세르비아를 비롯해서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이 러시아 제국 등의 암암리의 지원을 받아 봉기, 오토만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한다. 1877-78년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한데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범슬라브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유럽의 열강들이 모여서 이를 견제하고 나섰다. 특히 러시아가 몬테네그로 등을 통해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가지게 되는 것은 오스트리아 등 서구열강들에게는 악몽같은 일이었다. 1878년 비엔나회의(Congress of Vienna)는 바로 이러한 목적에서 진행됐다.

이 회의에서 나온 해결 방안이란 발칸의 소수민족들을 독립시키는 것. 이 참에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정식 독립을 쟁취하고, 불가리아가 오토만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했다. 또한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토만 터키의 주권을 인정한 가운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경영하게 되니, 정치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일어나게 된다.

1900년의 유럽: 군웅할거의 독일이 통일되면서, 지도가 지극 간단해졌다. 하지만 발칸에서는 없던 나라들이 생겨났다

19세기말 20세기 초 발칸이 민족분쟁이 화약고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였다. 제국과 제국들의 욕심과 지배욕이 중첩되고, 거기에 신생국들의 민족적 열망이  겹치면서 휘발성이 높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878년 비엔나회의를 주도했던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만약 유럽에서 또다른 전쟁이 있을 것이라면, 발칸의 그 어느 빌어먹을 바보짓에서 비롯될 것'If there is ever another war in Europe, it will come out of some damned silly thing in the Balkans.(자료원 : wikiQuote) 이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그 예지력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 스스로가 이런 구도를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는 아이러니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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