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3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2 : 세르비아와의 동침

1차 대전이 끝난 후 이러저러한 요행수와 우여곡절로 발칸의 맹주로 성장한 세르비아. 19세기에 갓 독립한 나라로서는 눈부신 팽창이 아닐 수 없었다. 1918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을 대내외에 선포는 했지만, 세르비아의 통치 및 국가관리 능력은 여러가지 면에서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토만 터키에게 500년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한 사회제도가 없이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가부장적 대가족Zadruga 중심으로 살았다. 문맹률은 높고 그나마 교육시켜놨던 대학생들은 몇번의 전쟁으로 죽어 나갔다. 근대적으로 훈련된 관료들은 적었으며, 민주주의의 전통은 물론 귀족들간의 대의의 관습도 없었다.

언어가 동일했지만,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기질과 역사. 레베카 웨스트의 Black Lamb and Grey Falon을 보면, '크로아티아는 변호사를 길러냈지만, 세르비아는 군인을 키웠다'는 취지의 말이 나온다. Pacta Conventa부터 시작해서 크로아티아는 주로 외부 민족들과의 '계약' 또는 '협정'을 통해서 국체를 지켜왔다. 면면한 Sabor의 전통도 있어왔고... 그러나 세르비아는 오토만에 폭력으로 망했고, 폭력으로 오토만을 도왔으며, 폭력(1804년과 1817년 봉기)으로 나라를 일으켰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 같은 기독교라고 하더라도 동방정교와 카톨릭간의 관계는 기독교/무슬림의 관계 못지 않게 나빴다. 역사적으로도 차라리 무슬림들보다 서로 비슷한 이 두 종교간의 증오가 더욱 뿌리깊었다는 기록이 여러번 나온다.

이렇게 안맞아도 한참 안맞는 나라에 크로아티아가 편입됐다. 크로아티아인들이 느끼게 될 이질감은 이루 말할 나위가 없었다. 세르비아와의 합병이 처음부터 마땅치 않았던 라디치는 공화정과 독립을 요구했다.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왕정이 이런 주장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1921년 수립한 왕국의 헌법에는 크로아티아가 그 오랜 세월을 지켜왔던 Ban과 Sabor 제도가 폐지됐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라디치는 결국 왕국의 의회에 참여하기로 한다. 역량이 모자란 세르비아 통치체제를 배경으로 최대야당으로 올라서게 되고, 세르비아 민주당과 연합하면서 세르비아 골수 민족주의자들의 심기를 긁어놓는다. 그런데 옐라치치 이래 거의 처음으로 크로아티아 민족의 총의를 대변한 이사람이 1928년 회기 도중 몬테네그로 출신의 동료 의원에게 총을 맞고 죽는다.

의회 암살 : 크로아티아 측에서는  스톄판 라디치 말고도 두명이 더 죽었다. 라디치의 장례식은 크로아티아에서 '국장'인 것 마냥 진행됐다. 이 때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라디치를 '우리의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으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불신과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의회정치로는 답이 안보인다고 생각한 알렉산다르 1세Aleksandar I은 결국 1929년 1월 헌법을 정지, 의회를 해산시키고, 왕정독재를 선포한다. 기분전환을 위해 나라 이름도 유고슬라비아왕국으로 바꿨다 (유고슬라비아는 남(Jug) 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 라디치를 각별히 아끼고, 총격사건 이후 그 병실까지 지켰다는 이 왕으로서는 바닥에서 돌아가는 일에 솔직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왕마저 몇 년 후인 1934년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서 마케도니아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한다....

알렉산다르1세 암살사건 : 불가리아계가 많은 마케도니아 분리주의자들이 일으켰지만, 이에는 후에 등장할 크로아티아 골수민족주의자들 우스타샤Ustaša가 관여되어 있었다. 곁가지로 영국 작가 레베카 웨스트는 이 사건을 다룬 기록영화를 보고 유고슬라비아를 찾았고, 20세기 기행문학의 걸작 Black Lamb & Grey Falcon을 남겼다.

이처럼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정치적으로 지속적인 소요와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 짧은 왕국의 역사에서 천수를 누린 왕 자체는 두 사람 밖에 없고, 쿠데타로 쫓겨나던가, 암살 당하던가 둘 중의 하나를 겪었으니 권력기반 자체가 심히 불안불안했다.

안그래도 내정도 불안한데, 외정 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독일과 이태리에서 파시즘이 급속도로 퍼졌고, 신생 독립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앞에는 먹구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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