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0일 목요일

구유고의 집시 1 : 어떻게 사나

발칸이 순수한 민족공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남슬라브계가 주류를 이루는 구유고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도 블라흐Vlach, 몰락Morlach 등의 연원을 알기 어려운 종족들이 기록에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 소수민족이 있다면 집시들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집시를 '낭만적으로' 그린 서구의 문학, 음악, 미술 작품들이 많이 소개됐고, '집시여인' 등과 같은 노래가 히트를 하기도 해서 집시에 대한 환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실제로 이들을 맞부닥치고 보면 '꾀죄죄'라는 단어가 머리속 단어창에 뜬다. 신호 대기중인 자동차 앞에서 구걸하거나, 괜찮다고 하는데도 굳이 앞유리창을 닦는 집시들을 보면 남루 그자체다.

발칸에서 집시들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터키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롬Rom, 로마Roma로 부른다. 집시 말로는 '인간'이라는 뜻이란다. 구유고 지역에서는 이들을 찌가니Cigani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독일의 찌고이네르Zigeuner와도 어원이 똑같다. 불가촉Untouchable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왔다.

1906년 경 세르비아의 집시 가족. Augustus Sherman이 찍은 사진이다. 

현재 서유럽에 비해서는 동유럽이 집시인구 비중이 높고, 동유럽에서 집시들이 가장 많은 나라는 루마니아다. 그럼 구유고 지역은? 센서스 상으로 합쳐놓으면 30만 정도 사는 것 같은데, 이들이 워낙 제도를 등지고 살고 있다보니, 실제 인구는 이것보다 몇배는 크지 않을까 생각들 하고 있다. 구유고 연방 중에서는 세르비아가 가장 많은 집시인구(센서스 인구로 10만 이상)를 보유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Romani people by country 참조]

구유고를 포함해서 발칸에서 집시들이 많다는 사실은 발칸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주는 부분이 있다. 그 만큼 사회가 빈틈이 많다는 것, 집시를 포함한 사회생태계가 있다는 것, 비록 천대는 하지만 나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들 집시 종족은 주로 오토만 터키 지배 하에서 가장 더럽고, 어려운 일들을 맡아주는 해결사로 살아왔다. 특히 우리에게도 알려진 바, 끝이 뾰족한 장대를 인간의 항문에 집어 넣어 척추나 내장을 흟고 들어가는 이 잔인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주로 집시들의 몫이었다.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는 이 장면이 소상히 소개된다.

이 외에도 대장장이, 신발장이 등 소소한 공예 등을 생업의 기반으로 삼았고, 말 사육, 거위 치기 등이 주요한 수입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런 산업이 사양길로 들어선 지금,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쓰레기 처리 등이 주요 직종으로 변한 듯 하다. 자그레브에서는 집집 마다 폐가구 등 크고 무거운 고형폐기물을 한꺼번에 집밖에 내 놓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이면 어김 없이 집시들이 나타나서 어디론가 물건들을 실어간다. 아예 쓰레기 하치장이 주거지역으로 변한 경우도 보인다.

때에 따라서는 집시들이 인근 공장에 취직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루마니아 출신의 걸출한 집시 브라스 밴드인 팡파레 쵸카를리야Fanfare Ciocarlia의 경우, 독일 음반 제작자가 발견하기 전까지 인근 섬유공장 노동자들이었다. 실제로 세르비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에 따르면, 집시들이 사회적인 고정관념(도둑질, 나태 등)과 달리 일을 곧 잘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기 힘들다보니, 도시에서 구걸에 나선 집시들도 많다. 아동들을 이용한 앵벌이가 거의 (수출)산업수준으로 자리잡았고, 이로 인한 인신매매 등이 집시들이 많은 나라의 사회 문제로 떠오른 바 있다. 집시들을 어떻게 현대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게 할 것인가는 구유고 및 발칸 지역의 주요한 이슈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집시하면 음악이다. 집시가 사회적으로 가장 성공할 수 있는 직종이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음악계에는 재즈 전설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t를 비롯해서 집시출신 기라성들이 배출됐고, 이들 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프로덕션 하우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길거리 밴드로 특화한다. 세르비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등지에서는 집시들을 천대하면서도 집시의 음악에 대해서는 이를 자신의 음악적 자산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오늘 날 구유고 지역에서 집시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세르비아의 사진기자 Ivan Aleksic  참조.]

1940년대 찍은 발칸 집시 밴드의 모습. 관악기가 오토만 군악대가 쓰다버린 쓰던 터키식 나팔 Zurna이다. 이게 나중에는  서양 목.금관악기로 바뀐다. 

어쨌거나 신기한 것은 이리 깨지고 저리 쫓겨다녀도, 집시들은 아직도 자기 언어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잡풀들이 이 바람에 휩쓸리고 저 물에 쓸려나가면서도 지천에 깔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나. 만약 어느 민족이든 생존이 지상과제라고 한다면, 이 특이한 민족 역시 역사의 승자라 아니할 수 없다.

자기 나라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면서, 그들 스스로는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는 피해의식도 없고, 뭘 빼았겼다는 억하심정으로 다른 민족을 곤란케하는 법도 없다. 기록하는 버릇이 없는 이들 입장에서는 역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낭만화하기 딱 좋지만, 이 역시 이들의 비참함을 생각하면 속없는 생각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직도 집시들이 스스로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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