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2 :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붕괴

1928년 크로아티아의 거물정치인 라디치의 암살로 인해 촉발된 위기에서 알렉산다르 왕은 결국 6개월의 장고 끝에 1929년 1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왕정 쿠데타를 일으킨다. 크로아티아와 갈라서고 대세르비아를 추구할까라는 개인적 망설임을 묻어버리고 왕국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왕정 독재자로서 알렉산다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행정구역 개편이다. 왕국내 기존까지 통용됐던 역사적 경계를 다 지워버리고 주요 강이름을 기반으로 바노비나Banovina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요 구성민족 명칭을 썼던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Kraljevina Jugoslavije으로 바꿨다. 왕국의 애칭 또는 별칭 정도로 쓰이던 유고슬라비아라는 단어가 공식적인 국호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국왕이 주도하는 국민통합의 첫걸음이었다.

1929년 새로 개편된 행정구역체제. 슬로베니아가 이름을 바꾼 것을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등의 전통적 경계가 없어졌다. 크로아티아의 반Ban 제도에서 비롯된 바노비나Banovina라는 없던 단어를 만들어서 광역지방의 단위로 썼다.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민통합 드라이브가 걸린 것 까지는 좋았으나, 참외에 줄을 그어넣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크로아티아 농민당, 세르비아 민주당과 같은 주요 야당 정당지도자들은 투옥 또는 가택연금되거나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결국 이같은 통합 조치는 오히려 왕국내 세르비아 헤게모니를 더욱 공고히 하는 효과를 낳았다. 왕국내 다른 민족들의 반발도  심해졌지만, 왕의 전횡이 강해지면서 세르비아 내부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반발과 원망이 누적된 끝에, 1934년 알렉산다르 왕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암살되고 만다. 암살을 직접 시행한 것은 마케도니아의 무장테러단체인 IMRO. 그 배후에는 무솔리니 치하 이태리에 결집한 크로아티아 골수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인 우스탸샤Ustaša가 있었다.

알렉산다르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페타르는 11살의 미성년자였다. 정부는 부랴부랴 영국에서 사촌 파블레Pavle 왕자를 섭정Regent으로 불러와서 왕세자가 성인이 될때까지 임시적으로 왕권을 맡겼다. 생각지도 않은 왕권을 물려받은 파블레공은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항구적인 솔루션을 원했다. 왜?

무엇보다 국제정세가 불안했다. 1차대전 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신생 세르비아의 앞을 막아선 거대제국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이제는 더 크고 험악한 독일 제3제국이 나타났다. 1939년에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이어 오스트리아까지 합병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괴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 까지 다가오자 왕국으로서는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거기다 이태리의 무솔리니도 달마시아 지역을 노렸다. 크로아티아 농민당에 접근해서 왕국의 균열을 도모했다. 파블레공으로서는 내정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크로아티아인들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1938년에는 이 같은 섭정의 뜻에 따라,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블라드코 마첵Vladko Maček과 왕국의 내무부장관(후에 수상)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Dragiša Cvetković 간에 밀고 당기는 협상이 지속됐다. 그 결과 나온 것이 1939년 8월의 '대타협'Sporazum이다. 핵심 골자는 크로아티아에 자치권autonomy을 부여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외부와의 협상으로 정체성을 지켜왔던 크로아티아와 폭력으로 나라를 만들어왔던 세르비아 간의 타협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고슬라비아의 진정한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39년 대타협으로 자치권을 인정받은 크로아티아, 즉 크로아티아 바노비나Banovina Hrvatske의 지도. 크로아티아는 연청색으로 표시된 부분인데 오늘날 보스니아(날줄로 표시)를 먹고들어 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나? 아쉽게도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사단은 1941년 파블레가 히틀러의 압력에 못이겨, 독-일-이의 추축국 동맹Tripartite Pact에 가입하면서 벌어졌다. 전통적으로 독일을 싫어한데다, 타협주의적인 섭정을 싫어했던 군부 민족주의자들이 (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노발대발, 41년 3월 곧바로 유고슬라비아로 짓쳐들어갔다. 1차대전 때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이번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탱크를 앞세운 독일의 전격전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왕국의 군대는 바로 백기를 들었다. 왕국을 점령한 독일은 곧바로 왕국의 해체에 돌입한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우스타샤에게 넘겨 독립크로아티아NDH를 만들고, 세르비아에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대타협을 성사시킨 크로아티아 농민당 마첵은 가택연금을 당했고,  소년왕 페타르 2세가 이끄는 왕가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민족간의 '대타협'은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1941년 히틀러를 만난 파블레공. 영국에서 교육을 받아 친영 성향이 강했지만,  영국보다는 주먹이 더 가까왔다. 

이 '대타협'이 몇년 만 더 일찍 만들어졌더라면, 그 이전에 알렉산다르 왕이 크로아티아와 분리했었더라면, 아니면 더 이전에 왕국이 만들어질 때부터 중앙집권이 아닌 연방제를 염두에 뒀더라면....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후세 사가들 조차도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만큼 유고슬라비아에 아쉬운 순간이 많았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대타협' 자체는 민족간 화합의 단초이자 재난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가장 극명한 단초로 '대타협'에는 보스니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은 당시의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인들은 무슬림들이 별도의 민족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했다. 무슬림은 종교 범주고 민족 범주가 아니지 않은가? 당시의 생각은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이슬람에 귀의한 크로아티아인 아니면 무슬림이 된 세르비아인'이었다. 이런 사고 방식은 결국 무슬림은 별개의 민족이 아니며, 따라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하나의 나라로서 역사적 뿌리가 부족하다는  인식으로 연계된다.

나중에 이런 인식은 1990년대 유고 내전의 발발과 확산에 직간접적 원인이 됐다. 후일 1990년 크로아티아의 투지만과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는 어떻게 두 민족 간에 유고슬라비아를 갈라먹을 것인가를 논의했다고 한다. 워낙 동상이몽이었지만 이 두 정치지도자들의 머리 속에는 39년 '대타협'이 들어있었던 듯 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보스니아가 90년대 유고 내전의 중심전장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당시에 대타협을 추진했던 사람들이 이런 것 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의 지도는 9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내파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레퍼런스 포인트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1유고슬라비아의 해는 이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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