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8일 토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1 : 유고슬라비아라는 몸

1918년 12월 합병을 통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탄생은 세르비아 카라조르제 왕가의 입장에서는 과거 두샨의 제국에 버금가는 역사적 영광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창업과 경영은 상당히 다른 종류의 기법을 요구하는 별도의 과정이다. 이제 스스로 나라로 자립한지 얼마 안되는 민족이 다른 민족까지 포함한 연합왕국을 다스리는 데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1차대전 이후 확대된 왕국에는 국명에 거명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이외에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때 왕국의 인구는 1,200만을 헤아리게 됐는데, (몬테네그로까지 포함한) 세르비아 민족은 39%를 차지, 최대다수였지만 과반수까지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보스니아 무슬림들이라는 별개의 정치세력까지 생각하면, 카라조르제 왕가의 밥상에 놓인 밥은 크게 차고 넘치는 양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지향하지만 민주적 훈련이 전혀 안되어 있던 세르비아 정부로서는 이들 민족의 요구가 보통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고, 주로 강압적 수단으로 대응했다.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저항에는 강력한 탄압이 뒤따랐고, 마케도니아에는 가혹한 동화정책을 썼다. 심지어는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세르비아인이라고 규정한 몬테네그로에서도 합병 반대세력에 호된 철퇴를 내렸다.

왕국령 마케도니아에서 조직된 내부마케도니아혁명기구(Internal Macedonian Revolutionary Organization, IMRO) 게릴라의 모습. 20세기 초 결성된 IMRO는 오토만 터키에 대항하는 불가리아계 민족 독립무장단체였지만, 발칸전쟁, 1차대전을 거치면서 반세르비아 무장봉기조직으로 변했다. 프랑스에서 암살당하는 알렉산다르왕을 죽였던 것도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결탁한 이들이다.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계를 중심으로 1918년부터 반세르비아 무장저항운동인 카착Kacak운동이 일어났다. 사진속의 인물은 운동의 지도자 아젬 갈리차Azem Galica와 그의 부인이자 여걸 쇼타Šota.

1920년 제헌의회에서는 전체 419석에서 세르비아계 2개 주요정당 183석, 공산당이 58석, 크로아티아 농민당이 50석을 차지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 속에 만들어진 새 헌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공산당은 처음부터 불법이었으니 퉁치고, 여기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발세력은 라디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농민당이었다. 결국 이들이 의회를 보이콧한 상황에서 헌법은 의회를 통과, 6월 28일 聖비드의 날(Vidovdan, Saint Vitus Day)에 선포됐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아이디어가 몸을 가진 현실 정치체로 전환된 순간이기도 했다.

헌법이 효력을 발휘한 다음 나타난 가장 큰 문제는 왕국에서 두번째로 큰 비중(24%)을 차지하는 '크로아티아 문제'Croatian Question였다. 국가연맹 하에서 공화국 체제를 지향하던 크로아티아 농민당수 라디치가 완고하게 협력을 거부했다. 왕가는 라디치를 투옥하고 이리 겁박 저리 회유를 반복했다.

왕국의 정부에 몽니 옹고집을 거듭하던 라디치가 생각을 바꾼 것은 1925년. 헌법을 받아들이고 정부참여를 선언했다. 정부가 이것을 환영한 것은 당연한 일, 회심한 라디치에게는 교육부 장관 감투까지도 씌워줬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정치상황이 이 때를 기점으로 미묘하게 변화한다.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 중심으로 구성된 세르비아 민주당이 이전까지의 기조를 180도 전환, 중앙집권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의회에 입성한 라디치의 크로아티아 농민당과의 연합을 통해 왕국 제1야당 연합이 됐다. 뭔가 좀 될 수 있으려나 싶던 바로 1928년 6월, 세르비아 민족주의 성향의 동료의원이 너무 나댄다 싶었던지 의회에서 라디치와 그 일행에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라디치는 즉사는 면했지만, 결국 두달 후 병상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정국이 소용돌이에 빠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28년 자그레브에서 라디치의 장례운구 행렬. 라디치는 20세기 초 크로아티아인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정치인으로써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국장에 가까운 장례행사가 치뤄졌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대변했지만, 후에 등장하는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의 우스타샤 운동과는 구별되는 온건노선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겠다. 

1928년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국왕 알렉산다르는 '아예 이참에 크로아티아와 갈라서고, 자기네는 그냥 하던 대로 大세르비아나 계속 추구할까'라는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실행하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국왕이 나서서 헌법을 위배(반역)할 수는 없다는 것, 둘째, 그리고 갈라서면 어디를 경계로 갈라서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아이디어는 너무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순수 세르비아인들로만 구성된 단일 국가.... 이 아이디어는 2차대전을 거쳐 1990년대 말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티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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