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9일 일요일

구유고의 음악 5 : King of Gypsy Music

먼저 음악부터..

샤반 바이라모비치가 부른 '풍뎅이'Bubamara. 화면은 이 노래가 OST로 활용된 에밀 쿠스투리차의 1998년작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Crna Mačka Beli Mačor의 장면을 모아서 만든 동영상이다. 샤반 바이라모비치는 이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했다고 한다.

또 집시 음악이다. 발칸 집시 음악은 브라스 밴드로 유명하지만, 실력있는 보컬 들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가수로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에스마 레제포바Esma Redzepova와 세르비아의 샤반 바이라모비치Šaban Bajramović를 들 수 있다. 오늘은 샤반 바이라모비치다.

샤반 바이라모비치. 단발머리 청년 당시, 그러니까 젊었을 때 모습이다. 찰슨 브론슨의 향취가 느껴진다. 

샤반 바이라모비치. 1936년 세르비아 남부 니쉬Niš에서 태어나서 2008년 죽었다. 대부분의 집시들이 그렇지만, 학교 공부는 설렁설렁 초등학교 중퇴, 길거리에서 음악을 배웠다. 19살 되던 해 군대 징집영장이 나왔지만, 연애에 빠져 병역을 회피하는 바람에 어찌어찌 '탈영'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판사 앞에서 어설픈 소리하다가 3년이면 끝날 형량이 5년반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끌려간 곳이 '벗은섬'Goli Otok(영어로 옮기면 Naked Island. 정치범/흉악범 수용소로 유명)이다.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굴러먹던 집시생활, 수용소에서도 잘 버텼다. 재소자 축구시합에서는 '흑표범'으로 이름을 날리고, 밴드에도 들어 루이 암스트롱 등의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쓰고 읽는 법도 익혔다고 하니, 교도소가 그에게는 학교가 됐다. 출소 이후 여기 저기 카페에서 노래를 하다가 1964년 첫 음반을 내고, 그 길로 엉겁결에 스타가 됐고, 그렇게 50여년 가수 인생에서 20여장의 앨범과 50장의 싱글을 발매했고, 집시음악의 왕kralj romske muzike라는 칭호를 얻었다. 곁가지로 수호천사Anđeo Čuvar(1988), Ciganska Magija(1998) 등의 영화에도 배우로 출연했다.

과거 유랑악단이나 다름없는 생활이다. 음반, 공연도 있지만, 결혼식, 피로연 등이 집시밴드의 주수입원이다. 로컬 카페가 우리나라와 같은 '업소' 역할을 했다.

예술가 답게 생활도 방탕했다. 노름.술.담배.여색 등. 성격도 괴퍅해서 정해진 스케줄을 따르지 않고, 아무때나 마음대로 훌쩍 사라졌다. 공연을 펑크내서 수소문해서 찾아보면 누구집 결혼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를 발견하기도 했다. 노래를 하지 않는 동안은 내내 불평불만이었다. '같이 작업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위키에 따르면 그는 700여곡을 작곡했다(확실하지 않은 부분이다. 자기 노래라고 주장한 노래가 원래부터 집시들 사이에서 불리워졌던 것도 있고, 같은 노래에 제목이 달리 달린 경우도 많다). 하지만, 축재의 방도를 딱히 아는 것도 아니고, 유고슬라비아 시절 내내 저작권이 잘 보호되지 않아서 말년에는 지독한 빈곤에 시달렸다. 그가 죽은 다음에 후배 뮤지션들이 위로 삼아 '고인은 저작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라고 세속에 초연한 영웅인 듯 그를 기렸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 같은 동료음악인을,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같은 영화인을, 특정 음반제작업자를 틈만 나면 욕했다. 허락 또는 보상 없이 자기 노래를 쓴다는 이유로. 하지만 정작 그는 쟁송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살아온 배경 때문이었을까. 집시가 남에게 소송을 건다는 게 허망하게 느껴졌을지, 아니면 남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이 많아 변호사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샤반 바이라모비치의 또 다른 노래 '깡총깡총'Opa Cupa. 헤르체고비나의 세브다흐 장르 밴드인 '모스타르 세브다흐 리유니언'Mostar Sevdah Reunion과의 공연 장면이다. 샤반은 이들과 2002년과 2006년 콜라보 앨범을 만들었다.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냥 뭉뚱그려서 '집시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멩코와 같이 토만 터키의 영향 때문인지 오리엔탈 풍은 확연하다. 그럼에도 불구, 그의 노래는 발칸 세브다흐Sevdah 장르에서부터 재즈, 삼바, 탱고 등으로의 다양한 확장성을 가진다. 90년대 까지 그의 음반은 난삽해 보이는 아코디온 반주에 싸구려 씬서사이저까지 곁들어져 음악적 이디엄 자체가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들린다. 게다가 프로덕션 밸류도 낮아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뽕짝 메들리 판들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낮은 질의 레코드를 커버하고 있는 '쏘울'이 있었다. 창법으로나 태도에 있어서나 우리나라 뮤지션 중에는 '봄비'를 히트시킨 박인수씨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세르비아어보다 집시들의 언어인 로마니어로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그 스스로가 언어상의 장벽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노래는 '쏘울'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가사를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한번은 티토 앞에서도 노래를 불렀는데, 티토가 집시의 언어를 (일부)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 크게 감명을 받기도 했다.

마지막 음반 Romano Raj에 수록된 '백장미'Bele Ruže. 프로모션 화면이지만 집시의 음악을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음반에서는 이 오랜 히트곡을 장고라인하르트 풍의 집시 재즈로 풀어냈다.

그에게 다행한 점이 있다면 성격상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콜라보하고 싶어하는 실력있는 후배 뮤지션들이 따라 붙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2000년대 이후 나온 음반들은 음악적 전성기를 지난 상황에서 발매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 같이 수작들이다. 특히 2006년 세르비아 재즈 밴드 '자발적대장간협회'Dobrovoljno Kovačko Društvo와 공동으로 만든 마지막 앨범 '집시의 천국'Romano Raj(PGP RTS 발매)에서는 재즈, 삼바, 레게, 탱고 등의 주법에 맞춰 자신의 히트작들을 다시 불렀는데, 장르가 바뀌었음에도 마치 자기옷 입은 마냥 편안하게 느껴진다. 죽음을 2년 앞둔 70세 고령에 녹음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놀라운 확장성, 놀라운 적응력, 놀라운 유연성이다. 가히 '백조의 노래'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명반이다.

백조의 노래. '집시의 천국'Romano Raj. 재즈, 삼바, 레게 등으로 풀어낸 자신의 히트곡 모음집이다.  이 음반에 등장하는 음악들은 모두 세계 구석구석에서 비루하게 시작된 음악들이다. 원래 예술을 비루한 현실을 더욱 숭고한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인간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샤반 바이라모비치는 천상 예술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