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5일 수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0 : 유고슬라비아라는 아이디어

유고슬라비아. 유고는 남쪽을, 슬라비아는 슬라브를 뜻한다. 합치면 결국 남슬라브인들의 단결 또는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유고슬라비아는 국가체제 이전에 하나의 아이디어였다. 비록 종교도 다르고 역사적 경험도 다르지만, 하나로 단결해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등의 강대국으로부터 민족의 자존과 자립을 지키자는 아이디어. 때문에 그 자체는 정복적 전쟁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유고슬라비아는 EU에 비견할 만한 야심찬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린 사람들은 19세기 크로아티아인들이었다. 류데빗 가이Ljudevit Gaj(1809 – 1872)가 일리리안 운동으로 남슬라브 족의 연합가능성을 가장 먼저 제기했고, 요십 스트로마이에르Josip Strossmayer 주교(1815 – 1905)가 이 아이디어를 이어 받아 정치세력화했다. 문제는 고장난명. 세르비아가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다.세르비아의 기본적인 관심은 순수 세르비아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의 형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세르비아인 지사들 상당수는 크로아티아인들도 카톨릭을 믿는 세르비아인이라고 보고 있었다.

요십 스트로스마이에르 : 교황무오류설에 반기를 드는 등 카톨릭 주교로서는 매우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해서 남슬라브족의 정치적 단결을 촉구했고 이를 위해 동방정교의 화해를 모색했다. 또 크로아티아인이 어디 가서도 꿀리지 말라고 자그레브 대학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해박한 지식과 식견으로 당대의 교양인이자 지금도 크로아티아의 사표로 남아있다. 

그러나 아이디어로만 머무르던 유고슬라비아 개념은 1차대전 때를 들어 실현가능성이 급속하게 높아진 정치적 화두로 부각된다. 강고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체제가 위기를 맞게 된 탓이다.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 영토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이 모여서 유고슬라비아 실현을 위한 활동에 돌입한다.

일단 합스부르크 영토내 3개 민족 명망가들이 1915년 영국 런던에서 유고슬라브 위원회Yugoslav Committee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합스부르크내 남슬라브 땅을 세르비아와 합병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이 굳이 세르비아와의 합병을 주창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연합국이 달마시아 등 크로아티아 땅을 미끼로 이태리의 참전을 부채질했던 탓이 크다. 이대로라면 합스부르크 영토내 남슬라브족의 영토가 또 강대국들에게 전리품으로 배분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연합국 편인 세르비아와의 합종을 내세워, 자신도 연합국의 편임을 증명하고, 영토의 통합성을 지키려는 시도였다.

이 같은 시도는 해외에서 활동중인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 만은 아니었다. 슬로베니아를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영토 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인들의 연합을 지지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슬로베니아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일부 카톨릭 주교들이 이런 운동을 주도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 사는 민족이 남슬라브 족에 해당된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일부 이 같은 움직임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층이 있었던가 하면,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안테 스타르체비치Ante Starčević((1823 – 1896)와 그 정치적 후계자들은 세르비아인들과의 합종을 적극 반대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대의 목소리는 1차대전에서 오스트리아-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묻혀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망하면서 1918년 10월 자그레브에서는 남슬라브 3개 민족으로 구성된 국민회의National Council가 권력을 인수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세르비아국'Država Slovenaca, Hrvata i Srba (DSHS, State of Slovenes, Croats and Serbs, '왕국'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을 선포한 일이다. 그러나 시대는 DSHS 편이 아니었다. 이태리는 원래 정해진 선을 넘어서 리예카까지 쳐들어왔다. 국민회의 안에서도 어서 세르비아와 합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약간 난삽해 보이지만, DSHS 지도. 오늘날의 슬로베니아 (일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를 포괄하는 땅이 바로 DSHS의 영토이다. 이 영토를 어떻게든 건사해야겠는데, 아쉽게도 DSHS 국민회의는 그럴 수 있는 실행력이 없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큰 정치세력인 농민당(당수 스톄판 라디치Stjepan Radić)이 반대했다. 공화정이 아니라 왕정에 합병된다는 것, 연방제가 아니라 중앙집권적 국가로 들어가는 것은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스스로가 이런 방향으로 활동을 한 탓도 있지만, 그의 말은 후에 대부분 들어맞았다.

결국 국민회의는 농민당을 빼고 베오그라드로 가서 페타르 왕을 접견하고, 1918년 12월 1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 왕국'Kraljevina Srba, Hrvata i Slovenaca을 대내외에 선포한다. 유고슬라비아로 가는 지난한 길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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