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8일 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3 : 2차대전과 체트닉

2차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짓쳐온 것은 독일 뿐이 아니었다. 헝가리는 1차 대전 때 빼앗긴 보이보디나Vojvodina를 되찾고자 했고, 불가리아는 발칸전쟁 때 빼앗긴 마케도니아Macedonija를 탐했으며, 아드리아 건너편의 이태리는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코소보를 노렸다. 독일군이 진주한 베오그라드에는 초록동색의 파시스트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크로아티아는 말 잘듣는 우스타샤가 점거한 것은 지난 번에도 말했고.

2차대전 당시 쪼그라든 세르비아 지도. 1912년 발칸 전쟁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마디로 암울한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우스타샤의 수령 안테 파벨리치는 독립크로아티아에 세르비아를 조직적으로 절멸하기 위한 행동에 들어갔지만, 힘없는 세르비아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히틀러가 세르비아 전체를 물샐틈 없는 통제하에 둔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만 주둔해 있었고, 정치적 기반이 없는 괴뢰정부가 집안 구석구석을 다스릴 힘이 없었다. 한마디로 대충 틀은 잡았지만, 내정에는 커다란 공백이 있었다. 이런 공백 속에서 자급자족적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무장 자위조직이 생겨났다. 체트닉Četnik 반군들이다. 

체트닉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더 깊다. 체타Četa라는 이름은 터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이 말은 소규모 부대를 의미한다. 오토만 터키가 물러나자, 발칸에서의 군소민족 간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마을과 지역 별로 때로는 알바니아계 게릴라, 때로는 마케도니아 혁명기구의 테러, 1차대전 때는 오스트리아와 같은 적들에 맞서기 위한 조직이 필요했다. 하지만 근대화된 심리와 조직체계를 갖추지 못한 무장조직이 할 수 있는 것은 게릴라전 + 보복테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어딘가. 누군가 쓰러진 왕국을 위해 싸워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 때 나타난 사람이 드라쟈 미하일로비치Draža Mihajlović다. 유고슬라비아가 독일에 항복할 당시 대령이었던 이 사람, 항복을 거부하고, 게릴라전을 벌이기로 작정, 1941년 세르비아의 중부 라브나 고라Ravna Gora로 숨어들어, 체트닉 운동을 주도했다. 


드라쟈 미하일로비치. 별명 드라쟈 아저씨. 말끔하게 면도를 하거나, 정돈된 수염을 갖춘 근대 서양인들과 달리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렀다. 세르비아 농촌에서 흔히 보이는 전형적 가부장의 모습이다. 미하일로비치의 심리적 지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다. 

당연히 왕국의 망명정부는 쌍수들어 환영했다. 당장 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다. 히틀러를 물리칠 수 있다면 누구와도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던 처칠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이 같은 성원에 힘입어 그리고 용맹무쌍 세르비아군의 수령 미하일로비치가 내놓은 필승의 전략은 '대기전술'이었다. 

대기전술? 연합군이 승기를 잡을 때까지 힘을 비축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최선? 체트닉 조직의 성격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독일군은 1941년 독일군 1명 부상에 50명, 독일군 1명 사망에 100명에 해당하는 보복을 하겠다고 공언한 바가 있었다. 그 해 세르비아 중부 크라구예바츠Kragujevac에서 독일군이 공격을 당해서 다수가 죽었다. 빡친 독일군이 예의 원칙에 의거, 양민을 거의 3,000명 가깝게 학살했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밤에는 퇴근해야 하는(!) 체트닉 입장에서는 이 같은 복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대기전술은 세르비아의 인명피해를 줄이자는 생각의 산물이었다. 

때문에 전쟁 전반에 걸쳐 체트닉의 주적은 독일이나 이태리 같은 점령군이 아니라 세르비아 민족의 박해자 우스타샤 혹은 민족해방의 경쟁자인 빨치산들이 된다. 2차 대전으로 외부세력에 점령을 당한 유고슬라비아는 업친데 덥친 격으로 내전까지 일어났다. 무의미한 살륙과 복수가 연이어 일어났다. 미하일로비치 입장에서는 말리고 싶은 부분도 있었겠지만, 체트닉 조직은 내부통제도 제대로 안됐다.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카톨릭 또는 무슬림 마을에서 수두룩하게 일어났던 양민학살은 분에 못이긴 즉흥 복수극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체트닉 운동의 근본목표 자체에서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하일로비치는 왕국의 원상복구보다는 대세르비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들을 체계적으로 말살하던 크로아티아인들과는 더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체트닉 조직의 가장 큰 경쟁자는 뭐니뭐니 해도 티토Tito가 이끄는 빨치산이었다.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공산당과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체트닉 간의 이데올로기적인 차이도 컸지만, 해방전선에서 빨치산과 체트닉 간의 실질적인 차이점은 바로 조직이었다. 티토는 마을 또는 지역 단위 투쟁으로는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기동군을 조직해서 독일, 이태리, 우스타샤 등에 대항했다. 체트닉이 결국 방어에 중심을 둔 조직이라면 빨치산 기동군은 공격과 타격에 촛점이 맞춰졌다. 설사 독일 점령군이 가혹한 복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데미지는 체트닉에 비해 작았다. 더구나 학살당한 가족 친지들의 복수를 원하는 자들의 선택도 체트닉보다는 빨치산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때문에 티토의 인민해방전선은 나중으로 갈 수록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처칠이 필요한 것은 이런 싸움꾼이었다. 양 측을 저울질을 하던 처칠은 1943년, '때'를 기다리는 체트닉이 아니라 언제든 싸울 의지가 넘쳤던 빨치산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빨치산과의 경쟁에 몰두하던 미하일로비치는 독일군과 연합하는 실수까지 범했다. 

복벽을 원하던 미하일로비치는 결국 2차대전 말로 들어서면서 빨치산에 밀리게 되고, 2차대전 후 공산당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것으로 체트닉 조직이 역사에 이별을 고하게 됐을까? 당연히 아니다. 20세기 초부터 형성된 체트닉의 전통은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된 이후에 다시금 고개를 들게 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첨병으로서의 과거를 세르비아인들이 기억해 낸 것이다. 세르비아에서는 얼마전에 미하일로비치를 복권까지 시켰다.

체트닉 깃발과 모자를 둘러쓴 세르비아인들. 당연히 최근 사진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체트닉 깃발에는 '신에 대한 믿음'S VEROM U BOGA '자유가 아니면 죽음'SLOBODA ILI SMRT이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중앙의 해골 문양이 이색적이면서도 섹시하다. 

1차대전에 이어 2차대전 역시 세르비아인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의 시기가 됐다. 티토가 나타나서 대충 상황을 갈무리했지만, 세르비아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지는 못했다. 어느 식자는 세르비아인들의 전형적 심리상태를 '피해망상'으로 묘사했다. 코소보에서부터 시작된 피억압의 역사, 근세를 거쳐, 더구나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도 참혹한 피해를 입은데다, 유태인들과 같이 조직적 살륙까지 당했다. 이러니 자라보고 놀란 마음, 솟뚜껑만 봐도 돌아버리지 않겠냐고. 이런 내상은 사회주의 시절 내내 잠복상태에 있다가 1980년대 말 크로아티아인들이 전통의 홍백 체크무늬 깃발Šahovnica을 들고 나왔을 때 다시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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